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8회)

충남시대 2023. 1. 10. 15:18

살인범 압송

 

우선 주위 환경을 최대껏 활용하게나. 버스 기사로부터 차장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면 주변에 앉아 있는 승객들에게도 눈치껏 협조를 얻어두란 말야. 화장실에 갈 때나 특히 평창에서 아침을 먹을 때 각별히 조심하고, 서울에 도착해서도 점심은 인계가 끝날 때까지 참아야 하네. 저엉 배가 고프거든 서류가방 속에 간식을 넣어두었으니 빵을 나눠먹도록 하되 그놈에게 물을 많이 먹여선 안 되네. 오줌이 자주 나오면 곤란하다 그 말이지. 또 그놈을 안쪽에 앉혔다고 방심하지 말게. 창유리를 깨서 유리조각으로 위협하거나 자해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심지어 자네 손목을 자르고 탈출할지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해두는 게 좋아. 모든 게 유비무환, 대통령 말씀이시네. 빌어먹을, 영동고속도로가 어서 뚫려야 할 텐데. 서울 압송거리만 생기면 간이 콩알 만해진다니까. 
  버스가 비포장 국도를 달려 평창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 솟아 있었다. 김석은 자기 손목에 채워진 연결 수갑을 풀고 정태수의 손목에 채웠다. 화장실에 다녀온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 친구처럼 식당골목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자네는 뭘 먹고 싶어?”      
  “김 형사님 좋으신 걸로 드시죠.”
  “간단히 설렁탕으로 때울까?”
  “그러죠."

  두 사람은 설렁탕집을 찾아들었다. 출입문을 열자 구수한 사골내가 코를 후볐다. 정태수를 데리고 홀에 들어선 김석은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식당 홀을 가득 메운 손님들의 시선이 죄수의 손목에 쏠렸다. 그제야 김석은 자기 몸으로 정태수의 손목을 가리며 얼른 수갑을 풀어주었다. 음식이 나오자 정태수가 수저를 들다말고 김석을 바라보았다.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말해봐.”
  “수갑을 왜 풀어주셨죠? 제가 도주하면 큰 처벌을 받으실 텐데?”
  “처벌 생각해본 적 없어.”
  “저보다야 처벌이 가볍겠죠?”
  “너 누굴 약올리는 거야?”
  “솔직히 말씀드려서 김 형사님이 바보 같아요.”
  “어서 밥이나 먹어.”
  “그렇죠?”
  “짜아식, 밥이나 먹으래두.”
  “안 그래요?”
  “하핫 짜아식, 그래 맞아. 살인보다야 형량이 가볍겠지.”
  “흑....”
  “왜 울어 임마, 밥맛 가시게.”
  김석은 멋쩍은 말을 던지고 수저를 들어 설렁탕 국물을 입에 떠 넣었다. 국물 맛이 구수했다. 고기도 푸짐했다. 김석은 일부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정태수의 식사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정태수는 아직도 천천히 국물만 떠먹고 있었다.  
  “밥맛이 없나?”
  “배가 불러서요.”
  “먹은 것도 없는데?”
  “음식을 먹어야만 배가 부른가요?”
  정태수는 마지못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자 김석에게 두 손목을 내밀었다. 
  “도로 수갑을 채우셔야죠.”
  김 형사는 정태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뒤따라 나온 정태수가 걸음을 재게 띄어 김석 곁으로 다가갔다.
  “이목이 있습니다. 수갑을 채우시죠.”
  “이목? 그런 거 상관 마.”
  그때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낙이 다리를 절며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팔아주세요.”
  껌통을 내민 아낙은 연방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석이 돈을 꺼내려 하자 정태수가 김석의 손을 뿌리치며 먼저 지폐 한 장을 꺼내주었다. 
  “잔돈은 그냥 두세요.”
  정태수는 거스름돈을 내미는 아낙의 손을 밀쳐냈다. 김석은 잠시 멈춰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정태수보다 먼저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아직 텅 빈 상태였다. 
  “자네도 인정이 많은 사람이군.”
  뒤따라 들어온 정태수와 나란히 앉자 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태수는 아무 대꾸 없이 창 밖에서 껌을 팔고 다니는 아낙의 모습에만 눈이 팔려 있다가 갑자기 김석을 바라보았다. 
  “부탁 말씀 드려도 될까요?”
  “뭔데?”
  “서울 누님 댁에 잠시 들렀으면 하고요. 언제 뵐지 몰라서.....”
  “누님이 교도소로 면회 오면 되잖아?”
  “나다닐 수 없거든요. 위독한 상태라.....”
  “어디가 편찮으신데?”
  “온몸이 망가졌죠. 선주에게 강간당한 후로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정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김석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마 캐묻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땀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태수는 맨손으로 땀을 훔치는 김석에게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비닐로 포장된 하얀 손수건에는 곱다란 꽃잎이 수놓아 있었다.
  “이걸로 닦으시죠. 누나가 보내준 거에요.”
  “자네가 아껴둔 걸 내가 쓰면 되겠나?”
  김석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얼굴에 대보니 감촉이 보드랍고 새물내가 설핏했다. 그 새물내를 맡자 김석은 옛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가 서천군 한산 삼촌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였다. 이웃집 여자애와 자주 소꿉장난을 즐겼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새물내 나는 치마폭을 들썩이며 김석의 각시 행세를 했다.
  “넌 내 신랑이어.” 
  그녀 네는 6.25가 터지고 3년이 지나 동해안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