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마지막회)

충남시대 2023. 2. 9. 16:18
수니의 두 번째 가출

 

 

 김석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이튿날 야채를 받으러 도매시장에 다녀와 보니 수니가 어린 은영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임신한 몸으로 가출했을 때는 수니만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귀여운 은영이를 데리고 사라졌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헤어지기로 작심한 듯한 수니의 메모가 자꾸 가슴을 할퀴어댔다. 
  새 아들을 얻었으니 이제 다복하겠네요. 축하해요. 은영이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거에요. 이제 은영이는 천덕꾸러기가 됐네요. 아무래도 일자리를 구해야 될 텐데 은영이가 부담스러워요. 당장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막막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겠죠. 양구 부모형제나 친구들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아요. 죽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에요. 다만 내가 죽을 임시에는 은영이의 거처를 알려줄 테니 알아서 처리해요. 보기 싫으면 고아신세가 되도록 버리고요. 당신과 이별하고 나니 은영이가 가엾네요. 
  김석은 메모를 거듭거듭 읽어보며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보았다. 아직 남편에 대한 애정이 소멸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애 좀 먹어봐라! 캥거루처럼 내복 속에 품고 애지중지해온 네 귀염둥이를 내가 소유하고 있으니 속 좀 팍팍 썪어봐라, 그런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제 발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이 또 가슴을 조였다. 더구나 일터를 구하게 되면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니의 고생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은영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예쁜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얼룩질 테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어린 가슴을 멍들게 할 것이었다. 
  날자가 지날수록 꿈에 나타난 은영이와 아내의 주제꼴이 후줄근해 보였다. 수니가 사라진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수니야, 왜 이렇게 애를 먹이니? 너도 옥자의 정신상태를 의심했을 텐데 왜 현명하게 판단하지 않고 감정만 앞세웠니.
  그렇게 원망할수록 수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쳤다. 은영의 포동포동한 볼에 피어나는 귀염기와 새알 같은 웃음새에 몸이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여자! 하늘에 대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집안은 여전히 캄캄했다. 연탄불에 끓인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오징어포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제야 경식엄마가 떠올랐다. 수니가 가출하기 전 혹 경식엄마를 만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숨에 경식이네 집을 찾아가 쪽대문을 노크했다. 방문이 열리고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슈?”
  경식엄마의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민망했다. 
  “은영애빕니다. 밤중에 죄송합니다.”
  “오매, 웬 일이시랴?”
  대문이 열리고 반색하는 경식엄마의 얼굴이 코앞에 나타났다. 그 친절미에 김석은 민망한 체면이 금방 가셔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만 같았다. 입에서 거침없이 수니의 가출이 튀어나왔다. 빙그레 미소를 띤 경식엄마의 입에서도 매끄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은영아빠를 기다렸구먼유.” 
  “그럼, 가출 전에 찾아왔던가요?” 
  “얼레, 내 정신머리 좀 봐. 그 말부텀 했어야 헐 틴디. 그렁게 은영엄마 사정은 간단헤유. 취직혀야 될 형편잉게 잠깐 은영이를 맡어달라구 사정허는 디다 은영아빠 형편을 봉게 가당한 부탁이구, 혀서 워쩔까 허다가 지가 맡기루 결단을 내구 말았슈. 혀서 은경이를 엄마 품에서 빼낼라구 헝게 요것이 얼매나 울어쌌는지 감당헐 수가 있어야쥬. 이쁜 것이 그러케 사납게 우는 꼴은 츰 봤구먼유. 어린 새끼가 콧물 눈물이 곤죽이 돼갖구 숨을 헉헉댄게 은영엄마두 목놓아 울다가 쓰러졌는디, 그런 난리가 읎었당게유. 그 꼴을 봉게 얼매나 가슴이 미어터지는지 지가 맡을 재간이 있어야쥬. 혀서 포기허구 에미 등에 엎여보냈당게유.” 
  “그 후로 연락이 없었나요?”
  “집을 나갈 줄은 꿈에두 몰랐쥬. 연락두 읎구유.”
  “혹시 어디로 갔는지 집히는 게 있으신지.”
  “은영엄마가 입두 뻥긋 안 했응게 워떻게 알것슈.”
  맥이 풀린 김석은 무거운 발걸음을 집 쪽으로 떼어놓았다. 찾아갈 곳이 막막했다. 양구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거니와 수니가 찾아갈 리도 없었다. 처제네도 다시 찾아갈 면목이 없었다. 의정부 연희네와 홍성 누나네도 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혹 원주로 시집간 막내처제를 찾아간 게 아닐까? 그동안 형제간 중에서 막내와는 왕래가 있던 사이였다. 김석은 서둘러 여행준비를 서둘렀다. 그때였다. 키가 멀쭉한 사내가 찾아왔다. 허리를 굽실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미련스런 기색이 묻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첫마디부터가 저자세였다. 남한테 이기지 못하고 꼭 지고 사는 사람 같았다.  
  “누구신지....”
  김석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저는 옥자 남편인데요, 제 처가 여기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해서 사과드리려구....”
  김석의 귀가 번쩍 열렸다. 금방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면 그렇지, 안도의 숨을 내쉰 김석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여기 앉으시죠.”
  김석은 얼른 벙어리의자 두 개를 벌려놓고 마주앉았다. 
  “지금 어디에 사시는데요?”
  “봉천동 산동넵니다. 신림동이야 이웃이죠.”
  “죄송하지만, 부인은 언제 만나셨죠?”
  “봉천동으로 이사한 직후니까 십년이 넘어요. 그 동네 공사판에 일하러 갔다가 술집에서 만났어요. 제가 술을 좋아해서 젤 먼저 찾아가는 곳이 술집이었죠.” 

 

- 社 告 -

 작가의 사정으로 «아내 찾아 90000리»는 31회로 일단 마감하고, 대표작  «칼날과 햇살»을 개작하여 다음호부터 연재된다. 잔아 김용만은 우리 소설문단의 뛰어난 기량과 탁월한 문체로 각광을 받은 바 있고 현재도 노익장을 작품으로 과시하고 있다.

(편집자 주)



«칼날과 햇살»

  2000년대와 1960년대의 특수 상황을 교직한 작품입니다.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남파되었던 살인전문가의 눈에 지금의 여기 현실이 어떻게 비쳐질지, 더구나 그 무장공비를 직접 다뤘던 전직 정보형사와의 인간적인 관계항은 이 시대, 특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북문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여고시절에 실성기가 있어 평생 방황하며 살아온 한 순결한 여성의 광기는 어떤 미학을 지니는지, 무척 고심하며 썼습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