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회)

충남시대 2023. 2. 22. 14:59
미친소녀 2
 
 

 동호가 서초경찰서에서 연주의 수첩을 인수한 것은 회사 출근 무렵이었다. 박 기사가 집 앞에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오르려는 순간 카폰이 울렸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행려병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싶으니 형사과로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동호는 회사 출근을 미루고 곧장 경찰서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서는 바로 집 근처에 있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담당 형사는 동호에게 예의를 차리고 나서 얄팍한 서류철을 내보이며 겉장에 부착된 여자의 얼굴 사진을 확인시켰다. 분명 연주였다. 갸름한 턱과 오똑한 코와 곱다란 눈매는 옛날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동호는 형사에게 그녀의 인적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알려주고 나서 처녀시절에 실성기가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형사는 사진 속 여자의 신원이 확인되자 그제야 동호를 찾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지난밤 교대 전철역에서 오십대 후반 여자가 플랫폼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소지품에서 비녀 하나와 낡은 수첩 한 권이 나왔고 그 손바닥만한 수첩에 강동호란 이름이 무수히 적혀 있었다고 했다.

신원을 파악해보니 사장님은 전직이시더군요. 1986년에 서울경찰청에서 퇴직하셨고 현재는 아신건설주식회사 대표로 계시고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나요?”

동호는 형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연주의 건강상태부터 물었다. 한 달 정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전해준 형사는 연주를 행려병자로 처리해야 될지 그 문제가 난처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내가 신병을 책임지겠소.”

동호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연주를 행려병자로 방치할 수 없다는 책임감이 순간 가슴을 쳤던 것이다. 길거리에 쓰러질 정도로 자기를 찾아다니기에 지친 여자, 그런 여자를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잊어온 그 죄책감에 빠져 동호는 신병 책임을 거듭 다짐했다.

신병을 인수하시면 입장이 난처할 텐데요.”

입장이 난처하다뇨?”

혹시 배승태씨를 아시나요?”

  “배승태?”
  “선배님이 강릉서에서 근무하실 때 취급했던 사람인데요.”
  “그래요? 그렇다면 혹시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 울진삼척사건 때 침투했던....”
  “맞습니다. 남파 무장공비.”
  “그 사람을 어찌 아오?” 
  형사는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동호는 조바심을 누르지 못하고 배승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형사는 그처럼 반가운 사람인데 왜 진작 찾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옳은 말이다. 마음만 먹었으면 벌써 만나봤을 텐데 왜 진작 찾지 않고 지금까지 까막 잊어왔던가. 
  “그럼 나연주씨와 배승태씨와의 동거 사실도 모르시겠군요?”
  점입가경이다. 뭐에 홀리는 기분이다. 연주와 배승태가 만나서 인연을 맺다니. 형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동호의 표정을 살피다가 책상 서랍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렇구나, 저기에 형사가 말한 내용이 적혀있었구나.  
  “첨엔 시시한 낙서로만 여겼어요.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긁적거린 데다 글씨도 고르지 않았죠. 대충 훑어보는데 메모 후미에 배승태란 이름이 나오고 그에 대한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이상한 내용이라뇨?”
  “읽어보시면 압니다.”
  형사는 수첩을 누런 파일 봉투에 넣어 건네준 다음 동호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은 경찰서 맞은편에 있었다.
  앞장서서 횡단보도를 건너 병원까지 걸어간 형사는 곧장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동호는 곧 연주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떨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린 형사는 여러 명이 누워 있는 입원실로 들어가 천천히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가 구석 자리에 여자 환자가 눈을 감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얼핏 보아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저게 연주의 모습이라니. 사진에서와는 달리 얼굴과 손에 때가 끼어 있어 길거리를 헤맨 흔적이 역력했다. 곁으로 다가간 동호가 살포시 손을 쥐자 그녀가 눈을 떴다. 하지만 동호가 누구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동호의 얼굴을 살피던 연주는 갑자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형사가 그녀를 안정시키며 동호를 알아보겠냐고 묻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호는 연주의 손을 잡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공식적인 확인 절차를 끝냈다는 듯 형사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동호는 입원실을 나와 원무과에서 환자를 독방으로 옮기는 수속부터 마쳤다. 한시바삐 깨끗한 방으로 옮겨주고 싶었다.
  수속을 마치고 경찰서로 돌아오자 현관에 서서 기다리던 형사가 악수부터 청했다. 동호는 수고했다는 인사치례를 하고 승용차에 올라 우선 수첩부터 꺼냈다. 그때 봉투 밑바닥에 무엇이 짚였다. 그제야 동호는 새삼 비녀를 떠올리고 얼른 봉투에 손을 넣었다.     
  비녀는 분명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시집오실 때 꽂고 왔을 그 옥비녀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동호는 두 손으로 비녀를 꼬옥 쥐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가만히 뺨에 댔다. 돌아가실 무렵에 연주에게 주셨을 정표.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연주는 자기가 어머니의 며느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마치 부적을 지니듯 깊이 간수해온 게 틀림없었다.

 

*

 

  차에서 내린 동호는 바닷가에 세워진 ‘포구횟집’ 입간판을 바라보다가 당산 자락으로 눈을 돌렸다. 생각난다. 바다를 끼고 산자락을 돌면 야트막한 암벽이 나타나고 암벽 위에 깔린 좁다란 분지에는 상여집이 있을 텐데, 그 상여집에서는 귀신 우는 소리가 처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