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형사? 기러니께니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바로 마당이었다. 잠시 마당 복판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 동호는 조심조심 창고방으로 다가갔다. 출입문 앞에는 헌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공손한 목소리로 주인을 찾자 안에서 “뉘시오?” 하는 대답이 새어나왔다. 배승태 씨를 뵈러 왔다고 받자 두세 차례 기침소리가 들리고 금방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이 잽싸게 동호의 몸을 훑었다. 분명 배승태였다.
“나 모르겠소?”
동호가 턱을 내밀자 문턱으로 다가온 배승태가 얼굴을 살폈다. 눈을 연방 끔벅대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인지를 알면 초점이 잡힐 텐데 안타까웠다. 살인 전문가가 세월에 먹히다니. 죽어서도 살기를 뿜어대던 그 독종들이.
“나요 나, 옛날 정보담당 강 형사.”
“강 형사? 기러니께니...... ”
한참 동안 동호의 얼굴을 뜯어보던 그가 맨발로 뛰쳐나와 덥석 손을 잡았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 같아 보여 마음이 놓이긴 해도 동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손을 잡고 반기는 배승태를 껴안고 싶으면서도 좀처럼 몸을 주기가 꺼림했다. 배승태는 동호의 그런 조심성을 이해한다는 듯 히죽이 웃으며 운동화를 구겨신고 평상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 너머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위에서 갈매기 떼가 깃을 치며 솟아오르다가 이쪽 언덕으로 날아왔다.
“무척 보고 싶었더랬어.”
배승태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동호는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배승태의 손을 정답게 잡아주고 평상에 마주앉았다. 분지를 배회하던 갈매기 떼가 다시 바다로 날아가 파도에 깃을 치며 날아올랐다.
“오늘 따라 갈매기들이 와 디랄이네. 귀한 손님인 걸 알구서리 저러나 모르갔구만.”
갈매기의 비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배승태에게 동호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왜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 이 좋은 봄날에?”
“친구가 없어서디.”
배승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 사람 있긴 했디. 일사후퇴 때 월남한 영감탱인데 포구에서 대장간을 했더랬어. 기런데 이태 전에 죽은 게야. 명서풍이 차디?”
배승태는 바람이 아직 차다며 동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과 터있는 방인 데다 홀아비 혼자 살아서 그런지 방안 냄새가 퀴퀴했다. 곰팡내 같기도 하고 해감내 같기도 했다.
“횟집은 세를 주고 여게로 나앉았어. 장사도 하기 싫구......”
배승태는 말을 중단하고 열린 문 밖으로 바다를 내다보았다. 동호는 이때다 하고 장사를 그만둔 이유를 캐물었다. 그 이유를 대려면 연주에 대한 말이 저절로 나올 터였다. 하지만 배승태는 못 들은 척하며 딴전을 부렸다.
“저 하얀 파도는 미친 게야. 미쳤으니께니 파랗디 않구 하얀 거디.”
하얀 거품을 내며 밀려오는 파도가 연방 바위에 부서지며 포말을 날리고, 포말이 높이 날릴 때마다 갈매기의 비행이 수직을 그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는가?”
동호의 물음에 배승태는 여전히 바다에 눈을 준 채 인간사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파도 이야기나 나누자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이 기러티. 처자식이 머이 소용이누. 암케나 살다 죽음 그만 아니갔어?”
“아무렇게나 살아? 그런 사람이 하필 침투했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산단 말야?”
“기걸 어케 알디?”
“이 사람아, 그런 조사야 기본 아닌가. 1969년 가을, 캄캄한 새벽에 고무보트를 타고 저 아래 산자락으로 침투한 자네 일행은 여기 상여집에서 이틀 동안 은신하다 태백 계곡으로 숨어들었어.”
“정확하군 기래.”
“바로 자네가 침투한 곳을 얘기해줬잖아.”
“메라구? 기랬던가?”
“자네도 세월은 어쩔 수 없군. 자기가 말해주고도 까먹다니. 참 세월은 무서운 망나니야.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 그때 왜 이틀 동안 상여집에 숨어 있었지?”
“산에 들어갈 기회를 노렸던 거디.”
“이 사람 끝까지 속이는군.”
“메라구?”
“자네는 거기서 다음 침투조와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던 거야. 자네가 그들을 데리고 입산한 직후 신고가 들어왔는데 초등학생이 그 상여집에서 밤에 귀신을 봤다는 거야. 예키 이놈, 하고 혼내줬더니 정말로 귀신은 귀신인데 군복 같은 걸 입었다는 거야. 곧장 달려가 현장을 조사해보니 분명 사람이 거처한 흔적이 남아 있더군. 상여틀 밑에는 미숫가루가 흘려 있었어. 급히 도망치느라 미처 못 치운 거지. 자네들이 쓰던 은신처를 다음 침투조가 또 사용한 셈이야. 즉 그 상여집이 공비들의 침투 루트가 됐던 거라구. 누구나 상여집은 기피하거든. 그럼 산 속에 들어간 자네 일행은 어떻게 된 거지?”
“고향인 포항으로 남하하다가니 거개가 사살되고 둘만 남았더랬어. 길코 눈 덮인 산을 헤매다가니 밥을 훔쳐먹으러 바닷가 움막에 숨어들어가.....”
“왜 산에서 바닷가로 내려간 거지?”
“침투했던 진리포구에서 배를 훔쳐개디구 북상할 참이었디.”
“그런데 자네 말 중에 또 숨긴 게 있어.”
“머이?”
“솔직히 말해봐. 지금도 숨길 텐가?”
“형사놈은 못 속이갔구만. 기래 맞아. 포항으로 남하한 거이 아니구, 울진 해안으로 침투한 124군부대와 합류해서 전투를 벌였더랬어. 기러다가니 토벌작전에 거개가 소탕되구 패잔병 중에서 둘이 몰래 북상중이었디. 기때 나 혼자 움막에 숨어든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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