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복장으로 애들과 병정놀이하다
파도소리가 바위에 부딪쳐 생긴 환청이겠지만 그 음침한 소리에 홀린 어부들은 근처에 집짓기를 꺼려했다. 충청도에서 이곳 동해안까지 흘러들어온 외지인 둘이 상여집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산 적은 있지만 무장공비사건 이듬해에 그나마 불타고 말았다. 소문에는 귀신이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고 충청도 사람 둘이 고향으로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서 밤늦게야 떠날 테니 강릉에 가서 호텔방을 예약해두게.”
박 기사를 차에 태워 보낸 동호는 곧장 당산 쪽으로 걸어갔다. 산자락을 따라 모래톱이 깔려있고 모래톱 막바지 분지에 빨간 함석지붕이 보였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햇살도 파도에 부서져 포말처럼 날렸다. 함석집 시멘트 벽면에는 광어, 우래기, 한치, 매운탕, 모듬회 따위의 메뉴가 적혀 있는데 칠이 바래서 우중충했다. 동호는 걸음을 멈추고 횟집 뒤쪽 언덕 위에 있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열댓 평쯤 되어 보이는 그 외딴 블록 건물을 연주는 창고방이라고 수첩에 적어 놓았었다. 창고를 개량해서 신방으로 꾸몄다는 창고방.
하필 상여집 터에 신혼살림을 차리다니.....
그런 사위스런 생각을 하며 동호는 횟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마 여기 횟집 자리가 충청도 사람들이 살다 간 움막 터일 성싶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주인을 찾아도 대답이 없자 동호는 다시 “계십니까?”를 외쳤다. 그제야 뒤란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곱상한 중년 아낙이 앞치마에 손을 씻으며 걸어나왔다.
“피서 철이 아니라 손님이 좀 뜸하네요.”
아낙은 손님 없는 것이 무슨 죄이기나 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고..... 배승태 씨를 찾아왔는데요.”
아낙의 표정이 금방 굳어졌다. 그녀는 창고방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에서요.”
“어떻게 찾아오셨죠? 친척은 아니실 테고. 친척이 없는 분이라서.”
“친구 사입니다. 나이는 내가 훨씬 아래지만.”
“친구요? 그분은 친구도 없으실 텐데..... 알고 오셨나요?”
“알고 오다뇨? 그분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직 모르시나본데, 마나님이 집을 나간 후로 좀 맹해졌어요. 장사도 집어치고, 그러니 찾아가셔도 난처한 꼴만 보실 걸요.”
“그럼 이 횟집은?”
“우리가 작년에 인수했죠. 애초에는 방파제 입구에서 장사했는데 서울 사람들은 여기처럼 구석진 곳을 좋아하걸랑요.”
“아주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신가요?”
“제 고향은 영월에요.”
“혹시 마나님을 아시나요?”
동호는 가장 궁금한 부분을 캐물었다. 집을 나간 마나님이라면 연주가 틀림없을 텐데 배승태를 만나기 전에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마나님 이야기를 꺼내자 아낙은 동호를 마루 쪽으로 데려갔다. 걷어올린 소매를 내리며 앞장서 걸어가는 모습이 장사 경험이 많은 여자 같았다.
“애초엔 우리 식당에서 일하던 여자였어요. 말이 조리가 없고 자주 실수를 저질렀죠. 그릇도 자주 깨고요. 여자가 좀 맹하긴 해도 맘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오래 데리고 있었죠.”
연주의 병이 다시 도진 걸까? 집을 나간 뒤로 병이 재발한 모양이구나 생각하니 동호는 가슴이 아팠다. 연주와 남매 사이로만 지냈던들 그녀의 정신은 온전했을 테고 평생 정처 없이 떠돌진 않았을 것이다.
“마나님이 진리포구에 처음 왔을 때가 언제죠?”
“칠 년 전쯤일걸요.”
“그럼 배사장과 마나님은 어떻게 만났나요?”
“배 사장님이 우리 식당에 자주 들르면서 사귀게 된 거죠.”
“동거하고 바로 영업을 시작했나요?”
“동거 후 반년쯤 지나, 배사장님이 이 자리에 집을 짓고 영업을 시작한 거죠. 그 후 마나님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우리가 인수한 거죠.”
“배사장과 동거할 때는 마나님 병세가 어땠나요?”
“정신도 맑아지고 살림도 참 잘했어요. 인근에 칭찬이 자자했죠. 그런데 몇 해 지나고부터 다시 이상해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밤중에 도망치고 말았어요. 그 후 배사장님은 집에만 숨어 지내다가 몇 달이 지나서야 바깥출입을 했는데 그때부터 맹한 짓을 하더라구요.”
“맹한 짓이라뇨?”
“손자 같은 애들과 어울려 모래톱에서 병정놀이를 했어요. 어디서 장만했는지 군인 복장까지 갖추고요. 참, 군인 복장이 아니고 인민군 복장이었죠. 지서에 잡혀갔지만 노인이라 봐줬대나 봐요."
"인민군 복장을 하고 애들과 장난쳐요?"
“장난이 아니라 아주 진지했어요. 병정놀이를 할 땐 눈빛이 아주 무서웠거든요. 포복하는데도 몸이 빨랐고요. 암튼 그 정도만 아셔도 그분 대하기가 수월할 거에요.”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요. 배승태 씨는 이 집을 짓고 오기 전에는 어디서 살았나요?”
“서울에서 살았대요. 원래는 포항에서 살았고요.”
“왜 여기로 와서 살까요?”
“그건 잘 몰라요. 포항에서 살다가 하나뿐인 누나가 죽자 서울로 떠난 것만 알아요.”
아낙이 자리를 뜨려했다. 잇속 없는 대화를 기피하는 눈치였다. 동호는 포구횟집을 나와 창고방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올라갔다. 사십여 미터를 올라가니 대여섯 개의 돌계단이 나타나고 돌계단 양 옆으로 연산홍이 붉게 피어 있었다. 연주가 가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 돌계단이 정겹게 느껴졌다. 동호는 잠시 발길을 세우고 연주가 거닐었을 바닷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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