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5회)

충남시대 2023. 3. 14. 10:29
체포논리와 자수논리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 큰 집을 택하지 않고 그 주먹만한 움막을 택할 게 뭐람?”
  “큰 집은 식구가 많구 동네 복판에 있잖갔어. 길코 외딴 움막인데 걸릴 게 머갔어. 만약 들켜두 몇 놈쯤이야 단칼에 벨 수 있으니께니.”
  “큰 집에 가야 먹을 게 있지 가난한 움막에 뭐가 있었겠나.”
  “기래도 찬밥이 있었잖나. 내 판단이 옳았던 거디.”
  “내 말은 우연을 말하는 게 아니고 전술적인 측면을 따지는 거라구.”
  “전술? 하하핫. 기막힌 말이군 기래. 기러티만서두 육감이 더 쓸모 있는 경우가 많아. 긴데 내가 여게 사는 걸 어케 알았디?”
  “진리포구는 자네보다 더 추억 어린 곳이지. 이 지역에서 근무도 했고, 부모님 산소도 계시고.”
  “기럼 고향이 여겐?”
  “아냐. 하지만 고향이나 마찬가지지. 주문진이 바로 이웃이거든.”
  “주문진이 고향이가? 우린 묘한 인연을 개디구 있군 기래. 기노므 에미나이도 주문진이 고향이랬어.” 
  “에미나이가 누군데?”
  동호는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캐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기런 여자가 있더랬어.”
  배승태가 어줍잖게 웃었다. 
  “저분은 누구신가?”   
  동호는 윗목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며 배승태에게 또 뻔한 질문을 던졌다. 사진 대여섯 장이 끼어 있는 그 액자에는 엽서만한 여자 사진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스냅사진, 분명 연주였다. 그녀는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는 여자라메.”
  배승태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받았다.
  “아는 여자라니?”
  “살다가니 헤어졌어.”
  “왜?”
  “기런 걸 와 묻네?”
  “우리 사이에 그런 것도 못 물어보나? 대답 않는 자네가 잘못이지.”  
  “하긴 기렇군. 암튼 내레 할 얘기가 많디. 암 할 얘기가 많구말구.”
  “그분이 그립겠군. 사진을 걸어둔 걸 보니.”
  “맘이 허전해서 놔둔 거라메. 일부러 빼기도 귀찮구서리.”  
  동호는 연주에 대한 정황이 궁금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연주와 자기와의 관계를 어떻게 고백할지가 걱정이었다. 언제 말할까? 차라리 영원한 비밀로 묻어둘까? 그 비밀을 알면 연주를 기다리는 꿈이 깨질 텐데? 동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왜서 말이 없는 게가?”
  배승태는 동호의 표정을 살피며 이제 여자 이야기는 그만두고 추억담이나 나누자고 했다. 
  “기래도 렛날이 젤루 행복했더랬디.”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행복하다니?” 
  “기땐 희망이 넘치고 용기가 펄펄했잖갔어?”
  배승태가 희죽이 웃었다. 동호 역시 그 시절이 그리운 게 사실이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긴박하고 위태롭던 시절의 절실한 추억 말고도 그들은 서로 끈끈한 정리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형사 출신인 동호와 무장공비 출신인 배승태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까지 서로 그리워하는 것도 진정한 감동유발이 그 시절에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

  울진삼척사건이 터진 이듬해 초봄이었다. 절기만 봄이지 아직도 태백계곡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토벌작전은 소들해졌지만 비상상태가 계속 되는 바람에 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여기저기서 공비 출몰 신고가 빗발쳤는데 신고가 많다보니 나무꾼이나 산행하는 사람을 공비로 오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실 신고사항의 대부분이 거동 수상한 일반인을 잘못 신고한 경우여서 신고전화가 짜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평상시 같으면 봉급 타먹기가 민망할 정도로 한가한 시골 정보업무이고 보면 그나마의 일거리가 한편 고맙기는 했다. 

  사천지서에서 경비전화가 걸려온 시각은 동호가 업무 인계를 막 끝낼 무렵이었다. 지서장의 격앙된 첫마디는 공비체포였다. 이번에도 오죽잖은 위인을 검거해놓고 호들갑을 떠는 거겠지 하면서도 동호는 재빠른 동작으로 지프차에 올랐다. 보나마나 일요일 하루를 고스란히 까먹어야 되는 데다 추운 날씨에 비포장도로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되니 그 하찮은 신고상황이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차가 산 속으로 접어들고부터는 그런 짜증은 차츰 경계심으로 굳어갔다. 가랑잎이 우부룩한 덤불 속에서 공비의 숨은 총구가 차를 노릴 것만 같았다. 동호는 잠시도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자루를 쥔 채 바위너설과 숲 속을 잽싸게 훑어보곤 했다. 골짜기 어디에서 총성이 울리는 환청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서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 가까이 솟아 있었다. 무장공비가 잡혀왔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나온 주민들이 정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지프에서 내린 동호는 보초병의 경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작대기로 패잡았답니다.”
  지서장은 아직도 흥분된 상태였다. 그는 삼십대 중반쯤 들어 보이는 두 사내를 가리키며 자랑삼아 떠들어댔다. 
  “저분들의 투철한 반공정신이 혁혁한 공로를 세운 거요.”
  지서장의 말 속에는 자기들의 간첩신고 교육이 거두어들인 막중한 성과가 묻어 있었다. 상황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얼굴색이 산그늘처럼 거무튀튀한 두 부락민 중 하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기네들의 공로를 자랑했다. 그리고 출입문 쪽 구석에 세워진 작대기로 동호의 시선을 끌어갔다. 손때 묻은 참나무 작대기 두 개가 경찰관의 엠투칼빈총의 위력만큼이나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