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1회)

충남시대 2023. 9. 26. 10:41

  박 기사가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에 먼저 오른 동호는 황억배를 뒷좌석에 앉혔다. 차가 서서히 시멘트 길을 미끄러지자 황억배가 또 너스레를 떨었다.
  “이건 구경도 못혀본 찬디, 영락읎이 구름을 탄 기분이네유.”
  “흔한 찬데요 뭐. 에쿠스라고 국산 찹니다. 손닙 접대 때문에 불가피 큰 차를 쓸 수밖에 없지만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요.” 
 “으이구 겸손허시긴. 남들은 그럴 팔자가 못돼서 한인디 사장님처럼 큰일 허시는 양반이야 의당 타고도 남쥬. 아 글씨 여기 같은 촌에도 외제차가 뻔질난당게유. 밴스니 삐엠이니 그런 것도 오구유.”
  그때 키가 땅딸막하고 몸집이 통통한 열 두세 살 됨직한 사내애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런 쥐새끼 같은 놈이 시방 워디서 오는 거여?”
  황억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동호가 박 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자 황억배가 부리나케 차문을 열고 나가 주먹으로 애 머리를 쥐어박았다. 
  “너는 평생 그지꼴로 살 거여? 맴 잡고 진득이 집에 붙어있으라구 혔잖여 이 육시헐 놈아. 어여 집에 안 갈거여? 핼애비는 쬐끔 늦을 팅게 실겅이서 저녁밥 챙겨먹고 일쯕 자란 말여. 알쟈?”
  “네.”
  “그러구 병구 너 이 어른헌티 인사 올려. 귀헌 분잉게 허리를 푹 수구리구 곱게 올려야 댜.”  
  차창을 열고 내다보는 동호에게 병구가 허리를 굽혔다. 동호가 손목을 잡고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쥐어주자 병구는 동네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애한테서 뺏을 돈이니 황억배에게 준 셈이었다. 
  “얼래, 웬 그런 큰 돈을....”
  “손자군요?”
  동호는 시치미를 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대체 누가 낳은 자식인지 궁금했다. 황억배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참말루 옛날 일이구먼유.”
  황억배는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송두문허구 보상금을 나눠갖고 우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쥬. 가족이 읎는 홀몸잉게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슈. 그려서 대전에 가자마자 평소 소망해온 도시생활을 시작혔지만 씀씀이가 헤퍼서 사오 년 만에 상금의 태반을 날렸슈.”
  목돈을 만진 김에 자그마한 집이라도 장만해야 옳은데 황억배는 셋방을 얻어 살며 경험도 없는 계란 장사를 시작했다. 말이 장사지 만날 술집 출입하는 게 일과였다. 몸을 섞은 논다니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딸을 낳은 직후 사라졌고 그 딸이 또 십대 후반부터 작부 노릇을 하다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리고 아들을 혼자 키우다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애는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그애가 바로 병구였다.
  차는 강을 끼고 앉은 매운탕집 마당에 세워졌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황억배가 서둘러 강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자리를 골라잡는 황억배의 서비스 감각이 돋보였다. 
  “송두문씨와는 자주 만나나요?”
  쏘가리매운탕을 주문한 동호는 넌지시 황억배의 속을 떠보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삼킨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긴 만났는디유.....”
  한참 만에 고개를 든 황억배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보상금을 모두 날린 황억배는 날품팔이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딸이 죽자 송두문을 찾아 서울로 떠났다. 송두문이 출세했다는 소문은 대전까지 자자했다. 보상금으로 사채놀이를 하던 송두문은 이십여 년 만에 큰손이 되었고 서울 시내 요지에 수백억 짜리 대형 빌딩을 지니고 있었다. 황억배는 그 건물 경비원으로 채용되었다. 언제나 송두문을 주종관계가 아닌 친구 사이로 여기던 황억배는 피뜩하면 송두문 앞에서 술주정을 부렸다. 
  “니깟 놈이 나 아니면 팔자를 고쳤겄어?”
  그게 황억배의 무기였다. 송두문은 그런 황억배에게 푼돈을 쑤셔주었고 나중에는 일이천만 원의 목돈을 주어 대전으로 내몰곤 했지만 고작 일 년을 못 넘기고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여이 배락을 맞아 직사헐 놈아! 도대체 내가 니놈헌티 뭔 업보를 졌길래 이러큼 당허냐 말여. 여적까지 주정뱅이놈 똥 딲아준 공밖에 읎는디 여이 씨부럴 놈아! 제발 이제 나줌 살자. 너야 개지랄을 다 혀봤응게 당장 뒈져도 여한이 읎겄다만 나는 이대로는 눈감고 못 죽어. 니놈이 보다시피 내가 평생에 맘놓고 술타령을 혀봤냐 계집질을 혀봤냐. 그러큼 살려고 바등댄 나를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리 작살을 내려고 지랄허는 거여 여이 썩을 놈아! 저승사자보담 더 지독헌 놈 같으니라구. 이놈아 어여 꺼져! 니놈 낮짝만 봐도 눈알이 핑 돌고 가슴이 답답헝게 내 눈 앞이서 썩 꺼져버리란 말여 이 개쌍놈아!”
“알것네. 다신 자넬 안 괴롭힘세. 이참이 마지막잉게 그저 못난 친구 둔 걸 죄업으로 알구.”
  “마지막?”
  “그려 그려.”
  “증말 마지막이라구?”
  “잉, 그려 그려.”


  “썩을 놈 육갑떨고 자빠졌네. 이놈아, 니놈이 삼세번만 골탕을 먹였어도 재차 삼세번은 속아주겄다만, 헌디 지금이 몇 번째냐? 니놈도 아가리가 있응게 주절대봐라.”
  “.....”
  “몇번짼지 어여 말해보라구. 아가리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터졌응게 바른대로 말혀보란 말여 여이 시부럴 놈아!”
  “열번은 넘을 걸세.”
  “열번까지야 아니지. 열 번이면 나는 벌써 황천길로 갔을 팅게. 내 승깔을 못 이기고 벌써 숟가락을 놨을 거다 그 말여. 거짓말 손톱 만큼두 않고 딱 아홉 번일세.”
  “미안혀. 하늘님헌티라도 약속헐 팅게 요번 한번만 살려줘.”
  “지랄허네. 너 같은 놈이 하늘님을 무서워 혀? 하늘님을 무서허는 놈 같으믄 벌써 내가 하늘님헌티 빽을 썼겄다.”
  “증말여. 이번 한번만 더 믿어줘. 내가 또 찾아오믄 내 모가지를 비틀어도 좋네.”
  “너 증말여?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 증말여? 또 찾아오믄 모가지 비틀어달란 말도 증말여?”
  “그려 그려.   
  “알았다.”
  송두문이 수표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