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9회)

충남시대 2023. 9. 13. 11:14

 

송두문과 황억배를 찾아가다 

 

 

 “나와 연애하겠다는 거요?”
  “연애는 벌써 시작했으니 이젠 약혼 단계죠.”
  “미치겠구먼. 이제 보니 당신 겁나는 여자군.”
  “저를 무시하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동호는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성미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장난스런 말로 얼버무릴 여자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올가미에 채일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소.”
  동호는 거짓말로 성미의 마음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성미는 그의 진지한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픈 말만 지껄였다.  
  “그건 아무 상관없고요, 나를 다방 여자로 만들지 않으려면 당장 거처를 마련해주세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있어? 그런 말이 입에서 뱅뱅 돌았다. 혹시 논다니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순진해보이던 여자가 본색이 저렇게 추하다니, 동호는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한순간이나마 그녀에게서 순결한 이미지를 느꼈던 자신의 안목에 부아가 나기도 했다. 술집 같은 데서 굴러먹었어도 한참 굴러먹은 여자 같았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과거를 캐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갑자기 말씀이 없으시죠?”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제가 못된 여자로 보이는 거죠? 그래서 걱정 되시는 거죠?”
  “.....”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첨엔 언니 말을 듣자 속이 떨리고 겁이 났지만......”
  “언니라뇨?”
  “고등학교 선밴데 그 언니가 코치해 줬어요. 저한테 맘이 없는 남자로 보이면 이런 식으로 떼를 쓰라구요.”
  “떼를 쓰라구?”
  “네.”
  “차라리 나를 납치하지 그랬소?”
  동호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성미는 대답을 삼킨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녀의 어깨가 흔들리더니 앞자락에 눈물 이 쏟아졌다. 철없는 여자! 동호는 문뜩 성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기에 대한 고마움이 연정으로 비화되고, 그 가슴앓이를 주체할 수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여자를 불손하게 여긴 것이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사과까지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 대신 성미의 기분을 바꿔줄 양으로 말을 걸었다.
  “취미가 뭐요?”
  성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취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동호는 몸을 틀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때 성미의 입에서 느닷없는 질문이 터져나왔다.
  “왜 하필 경찰관이 되셨죠?” 
  “왜라뇨?”
  동호는 미소를 지으며 성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찰관은 특별한 직업 아녜요?”
  “특별하다는 게 나쁘다는 뜻이오?
  “나쁘다는 건 아니고.....”
  “사실 나는 욕을 먹고 싶어 이 직업을 택한 거요. 욕을 많이 먹으면 철학자가 되기 십상이죠.”
  “욕도 욕 나름이겠죠.”
  “그렇소. 원칙을 지킴으로써 얻어먹는 욕을 말한 거요. 그런 욕을 많이 먹을수록 더 외로워질 수 있는 거요. 그래야 세상을 더 깊이 볼 수 있고.”
  그날 동호는 변두리인 교동에 빈 방 하나를 얻어주었다. 부엌과 마당이 따로 딸린 아담한 사랑채 방이었다. 안채와 별도로 출입문이 나 있는 데다 안마당과 출입문 사이에 향나무가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어 별채나 진배없었다. 
  “암튼 직장은 차츰 알아볼 테니 끼니 걱정은 말아요.”
  봉급을 타서 거의 혼자 쓰는 형편이라 한 사람 기초생활비야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한테는 용돈 정도만 대드리고 있었다. 주문진 집은 안채말고도 가게가 세 개 딸린 별채가 있어 거기에서 나오는 월세로 어머니와 연주가 아쉽잖게 사는 형편이었다.
  성미는 우선 벽지를 사다 도배를 마치고 거진에서 세간을 실어왔다. 세간이라야 옷가지와 해묵은 교과서뿐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거의 버리다시피 하고 버스에 실을 만큼만 챙겨왔다. 당장 필요한 가구와 이부자리와 집기는 동호가 시장에서 장만했다. . 
  성미는 마냥 즐거웠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새색씨였다. 그날 밤 동호는 처음으로 성미와 한 방에서 함께 지냈다. 

  *

  공주에서 승용차로 삼십여 분쯤 달려 면소재지에 도착한 동호는 차창 밖으로 주변 경관을 살펴보았다. 산세가 험한 계곡 쪽으로 시멘트 길이 깔려 있었다.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계곡을 지나 십여분쯤 더 달리니 양지바른 산자락에 열댓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부락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도록 박 기사에게 지시한 동호는 혼자 천천히 고샅길을 걸었다. 바쁜 일도 없거니와 백제의 고도를 구경 삼아 내려온 터라 서두를 게 없었다.
  뙤약볕 탓인지 고샅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돌담을 끼고 백여 미터쯤 마을 속으로 파고들자 길가 감나무 그늘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는 열 두세 살쯤 되는 여자애가 눈에 띄었다.
  “얘야, 말좀 묻자.”
  “뭔데유?”
  여자애는 연방 만화책에 눈을 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황억배씨 댁이 어디쟈?”
  “황억배가 누군데유? 아아, 병구 할아버지유?”
  “그래 병구 할아버지.”
  동호는 황억배의 가족 실태를 전혀 모르면서 병구를 아는 체했다. 
  “일로 쭈욱 올라가면 맨 마지막집이 나오는데 바로 그집이 병구네 집이쥬.” 
  말은 느려도 암팡진 목소리였다. 이놈한테서 정보를 캐야겠군. 동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우선 애한테 호감을 사려고 병구와 친한 사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물음이 탈이었다. 여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가 왜 거지 같은 애하구 친구에유?” 하고 쏘아붙였다. 
  “거지라니?”  
  “걔는 맨날 얻어먹으러 여기저기 싸질러 다닌다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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