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8회)

충남시대 2023. 9. 5. 15:54

왜 일가친척이 없는 거요?

옛날처럼 동호씨란 호칭도 쓰지 않았다. 응당 오빠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테지만 그 호칭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내한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줘. 나한테는 오빠라고 부르고.”
  동호가 일부러 말문을 트여주자 그제야 연주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주의 그런 태도 역시 낯설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나 웃는 모습이 옛날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옛날에는 자기 행동에 어떤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질질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생기가 돌았다. 또 옛날의 행동이 기계적이었다면 지금은 몸짓과 웃음새를 자기 나름대로 꾸며보였다.
  “정신이 온전해졌나봐요.”
  성미는 동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돌봐준 덕이야. 당신은 대단한 여자라구. 미친 사람 정신마저 돌려놨구려.”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될 것 같아요. 이참에 아주 고쳐드려야 해요.”
  “병을 완치시키긴 어렵겠지만 노력해봐야지.”
  동호는 성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애정 이상의 어떤 외경심마저 느껴지는 여자, 성미의 그런 모습은 옛날 어머니의 말에서도 예견된 터였다. 현명한 여자구나. 어머니는 성미를 본 적이 없으면서도 동호의 설명만 듣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동호가 성미를 처음 만난 곳은 진리포구였다. 그곳에서 임검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보형사로 발령 난 동호는 주문진을 포함한 인근 지서 관내의 정보업무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 무렵 태풍이 불어 해일이 발생했고 그 바람에 성미를 만나게 되었다.


  그 해일은 수십 년 만에 발생한 재해를 가져왔다. 해변의 가옥과 어선들을 송두리째 삼킨 해일은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모래톱을 사납게 핥아댔다. 해변에는 파도에 밀려온 시체들이 부서진 어선 조각과 뒤엉켜 넘실거렸지만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겨우 갈고리에 끈을 매어 낚시질하듯 시체를 건지는 수밖에 없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시체를 그런 식으로 한 구 한 구 수습해 모아놓고 공동으로 제사를 올릴 때였다. 유난히 슬피 우는 아가씨 하나가 동호의 시선을 끌었다. 식구라고 하나뿐인 아버지의 유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 기진 상태였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과 암담한 생활 걱정이 겹쳤던 것이다. 
  제사가 끝나자 다른 조난자들은 모두 차를 불러 시신을 싣고 각자 떠났지만 그녀네 영구는 어둠이 깔릴 때까지 제자리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실어갈 차비가 없었다. 관청에서는 임시로 포목과 제물과 관 정도만 대줄 정도여서 미처 거기까지는 손을 못 쓰고 있었다. 
  “모실 데가 어디죠?”
  동호는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며 물어보았다.
  “거진에요.”
  “거진?”
  아마 조난선이 거진 선박이거나 아니면 근처 포구 소속의 어선이겠지만 동호는 그런 내용을 묻기에 앞서 가슴이 철렁했다. 백 리가 훨씬 넘는 비포장길을 운반하여 매장을 마치려면 한 달 치 봉급으로는 태부족이었다. 공연히 동정심을 내비친 게 후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강릉에 있는 운수회사로 연락해서 트럭 한 대를 불렀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동호는 아가씨를 데리고 국밥집에서 끼니부터 때웠다. 다시 모래톱에 돌아오자 동호는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 그제야 아가씨도 이름을 밝혔다.. 
  “주성미라고 해요.”
  어느새 어둠이 밀려왔다. 차가 도착하자 동호는 적재함에 영구를 싣고 성미와 나란히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석에 올라 탄 기사는 영구 운반은 처음이라며 멋적게 웃고 나서 비포장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창으로 밀려온 밤바람에 한기를 느낀 성미는 몸을 움츠린 채 연방 눈물만 흘렸다. 동호가 제복 위에 걸친 점퍼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자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처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차렸다.
  “성미씨는 왜 일가친척이 없는 거요?”
  동호는 시신의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녀의 이름과 집안 사정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지만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태어나셨어요. 해방이 되자 어머니와 단둘이 귀국해서 정처 없이 떠도시다가 울진항에서 배를 타셨대요.”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전쟁 통에 폭격을 맞고 돌아가셨대요. 제가 두 살 때였죠. 그후 휴전이 되자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거진으로 일자리를 옮겼어요. 거진은 명태가 많이 나니까 생활하기가 좀 수월했대요.”
  동호는 성미의 말이 끝나자 차창으로 까만 바다를 내다보았다. 파도가 모래톱에 부서지며 하얀 속살을 내비치곤 했다. 저 캄캄한 바다를 보며 성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홍성군, 전통시장·상점가 활성화 위해 공동협력었다. 

                                                                                               *

  성미가 강릉으로 동호를 찾아온 것은 장례를 치르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몰라볼 만큼 예뻐보였다. 몸에서는 향수내가 설핏했다. 그러고 보니 입가에 핀 미소가 야해보이기도 했다. 동호는 성미를 데리고 뒤뜰로 나가 간이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성미는 의자에 앉자마자 어서 돈을 벌어 빚을 갚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동호는 그 말이 낯설게만 들렸다. 그녀에게서 순결한 이미지를 느꼈던 터라 베풀었다기보다 의미 있는 보상으로 여겼는데 되레 빚이라니.
   “다방에 나가기로 했어요.” 
  성미가 불쑥 내민 말에 동호의 몸이 움찔했다. 
  “다방 아가씨가 되겠다고?”
  “네.” 
  “그럼 당신 멋대로 하구려.”
  동호는 호주머니를 뒤져 있는 대로 돈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돈을 받고 나서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진에 가지 않고 여기서 다방 자리를 알아보겠어요.”
  “뭐요?”
  “강 형사님을 자주 뵐 수 있게 강릉에 머물겠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