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0회)

충남시대 2023. 9. 19. 10:06

요즘도 거지애가 있다? 동호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디를 싸질러 다니는데?”
  “동네방네쥬. 윗뜸도 가고 아랫뜸도 가구유.”
  “거기서 뭘 해주고 뭘 얻어먹지?”
  “해주는 일은 암것도 없구 밥만 축내는디 동네서 모두 혀를 내둘러유. 누가 뭐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고 제 멋대로 말썽만 피운다구유. 그애 땜에 정말 속상해죽겠어유.”
  “왜? 무슨 일이 있었니?”
  “오늘도 방금 우리집서 점심을 얻어먹고 나갔는디 글쎄 내 러브러브 인형이 없어졌어유. 걔가 훔쳐간 게 틀림없구먼유.”
  “병구 아버지는 뭘 하시냐?”
  “아버지가 없어유.”
  “엄마는?” 
  “엄마도 없어유. 어디서 주어 온 애란디, 그래서 싸가지가 없나봐유.”
  “병구 할아버지는 지금 뭘 하시는데?”
  “잘 몰라유.”
  “고맙다. 병구가 네 인형을 가져갔다면 돌려주도록 하마.”
  동호는 여자애와 헤어지고 곧장 걸어올라갔다. 집 서너 채를 지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싶더니 야트막한 산자락이 나타나고 언덕 밑에 토담집처럼 생긴 헌집이 나타났다. 요즘 농촌에서 흔히 눈에 띄는 폐옥 같은 집이었다. 울타리도 없는 집안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적막감이 맴돌았다. 도저히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더위 탓인지 방문은 열려 있고 문 앞에는 기다란 평상이 놓여 있는데 밥풀이 붙어 있는 평상 바닥에는 파리가 시커멓게 달라붙어 있었다.
  토방으로 다가간 동호는 방안을 기웃거렸다. 덩치가 큰 노인이 목침을 베고 누워 있었지만 잠든 모양인지 인기척을 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동호는 마당 입구 쪽으로 멀찍이 나와 “계세요?”하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하지만 방에서는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혹시 귀가 어둔 게 아닐까 싶어 방문 쪽으로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누워 있던 노인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상체를 일으키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삼십삼 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황억배가 틀림없었다. 그가 방문 쪽으로 기어나오며 얼굴을 찡그렸다. 햇살이 부셔 눈이 어리어리한 모양이었다.
   “뉘슈?”
   “황억배 씨가 맞죠?”
   “그런디유?”
   황억배가 평상으로 기어나와 앉으며 동호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집안 꼴과는 달리 얼굴에는 불그레한 화색이 돌았다.
   “나 모르겠소?”
   동호는 자신도 모르게 옛날처럼 말이 놓아졌다. 열 살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미안한 생각이 들어 존칭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노인장께서는 젊은 시절에 강릉 근처에서 사신 적 있죠?”
   황억배는 한참동안 눈을 끔벅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호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동호는 황억배를 만나러 떠나기 전 먼저 전화를 걸어볼 참이었지만 혹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 않을까봐 불시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송두문과 황억배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먼저 찾아갈지를 생각하다가 약아빠진 송두문보다는 순박한 황억배를 먼저 만나기로 작정했는데 송두문을 먼저 만나면 미리 황억배에게 연락하여 말조심하라고 윽박지를 게 뻔했다.
  “내 얼굴을 자세히 보세요. 자 알아보시겠어요?”
  동호는 황억배 앞으로 얼굴을 바싹 내밀었다. 송두문의 이름을 대면 쉽게 알아보겠지만 순전히 황억배와 일대 일로 소통하고 싶었다. 그래야 실은즉슨, 하며 진실을 곧이곧대로 토로하고 싶어했던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있었다. 
   “글쎄유. 눈꾸녕이 아주 어둔 것도 아닌디 통 몰라보겄는디유. 실례지만 성함이 워찌 되시남유?”
   “진리포구에 사실 때 무장공비를 잡아서 공을 세우셨죠?”
   “이잉? 무장공비?”
   그가 불에 덴 듯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그 사건을 취급했던 강동호 형삽니다. 이제 나를 알아보겠어요?”
   “허허, 내 눈꾸녕에 동티가 씨었당게. 이러키 반가운 분을 후딱 못 알아보다니 원참.”
   그가 덥석 동호의 손을 잡았다. 좀 과장됐다 싶은 그의 너스레에는 분명 과거 약점을 덮어달라는 투의 엄살이 묻어 있었다. 동호는 그의 불안한 마음을 눙쳐주려고 정답게 손을 맞잡고 무척 반갑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황억배는 동호가 지금도 형사로 근무하는지를 물었고, 벌써 그만두고 지금은 사업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을 밝게 폈다.
   “내가 원체 눈썰미가 둔해서…… 인제 봉게 풍채가 훤허신디 엄청난 사업을 허시는 모양이구먼유. 그렁게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여. 오래 살고 봉게 이러큼 귀허디 귀헌 분을 만난단 말여. 헌디 워째서 이러큼 젊댜? 강 형사님은, 아니 강 사장님은 본시 맘이 유허싱게 하늘이 대복을 주셨구먼유. 누추허지만 어여 평상에 걸처앉어유.”
   황억배란 인간이 언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눈치도 빨라지고 아부할 줄도 알고 능청도 떨 줄 아는 그가 무척 낯설게 보였다. 옛날의 순박한 황억배가 아니었다. 세월이 변하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생활이 변하게 만들었는지, 동호는 황억배의 달라진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실인즉슨, 하고 속내를 털어내던 눈치 어둔 옛날의 황억배가 그리웠다.
   “쭉 여기에 사셨나요? 여기가 고향이시죠?”
   “여기가 고향은 맞는디, 쬐끔밖에 못 살았구먼유.”
   “그럼 서울에서?”
   “나중에 서울서도 살긴 혔지만 대전서 거진 살었슈.“
   황억배가 말을 돌렸다. 그의 얼굴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구두를 신은 채 평상에 걸터앉았던 동호는 토방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근방에 술집이나 식당이 있겠죠?”
  “있구말구유. 여기처럼 아사리 같은 산골도 인제는 원체 개명혀서 수퍼란 것도 생기구, 저기 산모랭이를 돌면 데부뚝이 있는디 데부뚝 근방에는 큰 식당들이 부지기수에유. 밤에는 근방이 온통 꽃밭이랑게유. 그 바람에 나 같은 풍신이 밥을 안 굶고 살아가지만유.”
  “앞장서시죠.”
  동호는 평상에서 내려선 황억배를 앞세워 마당을 빠져나왔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