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2회)

충남시대 2023. 10. 24. 11:07

3억잉게 쓰고 싶은 대로 써봐


 

 송두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억배를 혼자 남겨둔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로 지하층까지 내려온 그는 곧장 카페로 들어가 술을 청했다. 왠지 가슴에서 슬픔이 치올랐다. 황억배에게 한 뭉치를 주고 나니 다소 마음의 빚이 덜어진 것 같기는 했다. 거짓말로 우겨서 탄 포상금 아닌가, 그 죄업을 어떻게 풀까 하고 늘 가위눌리며 살아왔는데, 그 죄업을 탕감받을 수만 있다면 건물 하나쯤 당장 요절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디 그 무장공비는 지금 워디서 워떻게 지내고 있는 거여?
  송두문은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몸이 나른했다. 몸이 풀어지자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굶은 채 멀건 보리죽을 끓여 남편의 배를 채워주던 아내. 그 눈물겨운 아내가 재산이 불어날 즈음 강도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바보! 돈보따리를 던져버리고 목숨을 구할 게지 워쩌자고 돈 대신 목숨을 버렸단 말여! 
  송두문은 돈에 미쳐지내다 아내마저 죽게 만든 자신이 한갓 짐승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휴지처럼 여겨졌다. 자기 재산을 모두 긁어모아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었다. 그는 난생처음 죽음이 떠올랐다.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이 가슴을 쳤다. 갑자기 사무실에 남아 있을 황억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로 어여 내려와.”
 화억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리나케 내려왔다. 송두문은 황억배가 앞에 앉자 아까 줬던 오천만 원짜리 수표를 회수하고 대신 일억 짜리 수표 석 장을 긁었다.
 “아주 석 장으로 채웠응게 니놈 쓰고싶은 대로 써봐.”
 “삼억이냐?”
 “워째 즉으냐?”
 “이러믄 안 댜.”
 황억배가 수표 두 장을 돌려주었다.
 “육시헐 놈아, 내 재산이 얼만 줄 알기나 혀? 니깟놈 백 놈이 뒈질 때까정 지랄혀두 죄 못 쓸 돈여 이놈아. 헝게 건방 떨지 말고 어여 죄 갖고 꺼져. 그 대신 아까 헌 약조 꼭 지키라구. 다시 안 온다는 말, 알겄냐?”
 “그려 그려. 실인즉슨 나도 사람인디 끝까정 짐승 노릇을 허것남.”
 “그 돈은 니 껑게 니 맘대로 써도 좋지만 이참에는 두 장으로 집을 장만허구 나머지만 갖고 장사를 혀봐. 그려야 망해도 집은 남을 팅게 말여. 몸을 뉠 집만 있어도 먹고사는 거야 워뜨게든 해결헐 수 있잖여.”
  “그려 그려, 명심헐 팅게 걱정 말어.”  
  수표를 모두 챙겨서 안주머니에 넣은 황억배가 자리를 뜨자 송두문은 혼자 거듭거듭 술잔을 비웠다. 생각할수록 지난 세월이 너무 가파랐다. 보상금을 움켜쥔 채 서울로 올라간 그는 고스란히 은행에 예치하고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숨겨둔 돈이 있으니 막일을 해도 몸에 힘이 솟았다. 끼니만 해결되면 재산은 저절로 불어날 것이었다. 그렇게 한두 해가 지나고 노동판에서 안면이 넓어지자 전표를 담보 삼아 돈놀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채업자가 된 셈인데 칼침 맞을 경우가 부지기수일 정도로 위험한 투자를 반복하며 돈을 긁어모았다. 아내를 잃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처럼 돈이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던 송두문이지만 마음 속 깊은 자리에는 늘 실올 같은 가시가 가슬거렸다. 양심이었다. 그 양심이 무시로 배승태를 떠올리게 했고 그때마다 송두문은 가슴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곤 했다. 

 



  거금을 지니게 된 황억배는 대전으로 내려가 우선 이억삼천만 원으로 집을 한 채 장만했다. 송두문의 충고대로 되도록 부동산 투자에 많이 쓰고 적은 돈으로 장사 밑천을 삼을 작정이었다. 그는 나머지 돈 칠 천만 원으로 중국집을 차렸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장사를 시작하니 그전과는 달리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논다니와의 상종도 끊고 장사에만 매달렸다. 반년쯤 지나자 매상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일년이 지나자 매상이 곱절로 늘어나고 황억배의 몸에서도 장사꾼 티가 역력했다. 그는 인근에서도 신망을 샀다. 그 무렵이었다. 까막 잊고 지내온 군대 동기생 하나가 찾아와 무턱대고 한 달 가까이 빌붙어 지내며 장삿일을 돌봐주었다. 착실히 허드렛일도 거들고 야채 다듬기 따위의 아낙 일도 자청했다. 그처럼 황억배에게 신임을 얻어갈 즈음인 어느 쉬는 날이었다.
  “지친 몸 쉬기엔 화투보다 더 좋은 오락이 없네.”
  친구는 하루만 즐기자며 황억배를 놀음판으로 유인했다. 다른 짓은 다해도 화투만은 모르고 지내온 터라 황억배는 호기심이 당기기도 하거니와 잔돈 몇 푼쯤은 술값 셈치고 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도리짛고땡 판에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몇 천 원씩 입질을 하다 몇 만 원씩 부킹 액수를 늘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패에 돈을 놓는대로 땄다. 오야패를 잡으면 도리로 몇 갑절의 목돈이 쌓였다. 한나절에 하루치 장사 이득의 열배가 넘는 돈이 호주머니를 채웠다. 황억배는 이튿날에도 장사를 친구에게 맡기고 놀음판으로 달렸다. 또 큰돈을 땄다. 그가 돈을 잃기 시작한 것은 셋째 날부터였다. 이틀 동안 딴 돈 말고도 하루치 장삿돈을 모두 날렸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자 집마저 거덜내고 말았다.
  죽고 싶었다. 죽을 용기로 한번만 더 송두문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용기를 내어 서울로 올라간 황억배는 송두문의 사무실 앞에까지는 접근했지만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변명할 수도 없고 사정할 수도 없었다. 발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황억배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들고 여관을 찾아갔다. 방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고 나니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 혁대로 목을 옭아맸다. 퉁 하고 몸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못이 빠졌던 것이다.
  대전으로 내려간 황억배는 날마다 술에 절어 걸식으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친구가 황억배를 발견하고 고향으로 데려와 농삿꾼으로 만들었다. 황억배는 품삯을 모아 움막도 짓고 고아원에서 외손자도 데려왔다. 불과 이태 전이었다. 그 후로 유원지가 생기는 바람에 여기저기 식당에서 잔일을 봐주며 목숨을 부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