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화통일이디 머갔어?
“약한 모습?”
“내레 기걸 죽은 목숨이라고 여겼더랬어. 한마디로 오마니마저 부정하고 싶었던 게야. 오마니가 거추장스러웠어. 오마니 꿈을 꾼 거이 창피했더랬어. 오마니를 그리워한 거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배라먹을 그리움 땜에 꿈을 꾼 거구 총을 주게 된 게야.”
“.....”
“깡깡 언 몸을 녹이려고 뜨순 아궁이 앞에 앉아 있으니깐 어드러켔어. 식곤증까지 겹쳐개디구 바로 졸음이 왔디. 기때 꿈 속에서 오마니가 나타나신 게야. 어린 난 감나무 토막으로 팽이를 만들고 있더랬어. 보통 땐 팽이를 낫으로 깎았더랬는데 은장도로 깎고 있었디. 은장도를 무척 갖고 싶어 안달했거든. 오마니가 깊이 간수할수록 더 갖고 싶었던 칼이었어. 장난감처럼 귀엽게 생겼디만 외경스런 느낌을 풍겼디. 오마니는 가끔 옷장 속에서 꺼낸 그 쬐깐 칼을 가슴에 안고 은밀히 대화를 나누곤 하셨어. 은장도와 속삭이던 대화를 엿들어보면 아바디는 나라에 불경한 일을 저지르다 당하신 게 틀림없었어. 여보, 이 엄동 어느 골짜기에 눠 계신교. 기런 탄식이 끝나면 오마니는 으레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껴 울었디. 하디만 내레 오마니의 슬픔보다 은장도에 더 관심이 컸더랬어. 울다가 잠든 오마니 품속에서 몰래 은장도를 뒤져개디구 감나무 토막을 뾰족하게 깎기 시작했디. 팽이가 다듬어질 무렵이었을 게야. 오마니가 조용히 손을 내미시며 날 타일렀어. 아가 다칠라. 칼 가지고 놀믄 다친다. 늬 아버지도 총칼을 탐내더니만 결국 그걸로 당하셨니라. 퍼뜩 이리 내놓으련. 기래도 내가 떼를 쓰고 칼을 안 드리니께니 오마니는 매를 들어 내 등짝을 때리셨어. 얼떨결에 오마니 손에 그 칼을 놓아드렸디. 퍼뜩 꿈에서 깨나보니께니 내 권총이 딴 사람 손에 쥐어진 게야. 어부들한테 총을 준 거이 아니고 오마니한테 은장도를 드린 셈이디.”
꿈에 나타난 어머니. 그랬었구나. 동호는 그제야 의문의 매듭이 풀렸다. 그런 아름다운 꿈마저 숨겨오다니. 어머니가 어린 자식이 연장을 가지고 놀다 다칠까봐 칼을 빼앗은 그 모정마저 부끄럽게 여긴 독한 인간. 동호는 배승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벌겋게 열기가 번져 있었다. 그 열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인 듯 싶었다. 동호는 배승태의 말을 자르지 않으려고 손수 술을 따라 마셨다.
“기러케 나를 보호하시려던 오마니가 연주한테도 현몽하셔서 우리한테 부부 연을 맺게 하셨구나, 기러케 착각한 거라메. 연주는 나하고 살면서 병이 도진 게야. 고년은 이런 말도 했더랬어. 오마니가 자기한테 옥비녀를 주셨다는 게야. 고년과 내가 부부연을 맺은 징표라면서 비녀를 꺼내놨어. 정말 미치갔더라구. 누구 껀디 모를 비녀를 우리 오마니한테서 받았다고 하니께니 환장하잖갔어? 나는 방에서 혼자 소리를 질러댔디. 김일성 동지 만세! 하고 말이디. 기걸 보고 연주가 놀라개디구 밤중에 도망친 게야.”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는가?”
“안 미치려구. 기래야 살디.”
“그래야 살아?”
“기럼.”
“.....”
“암튼 연주 땜에 맘이 약해딘 게야. 하디만서두 연주를 원망하딘 않아. 요샌 고년이 불쌍타는 생각이 들어. 고년은 아름다운 꿈속에 묻혀 살았을 뿐이거든. 기걸 깨고 싶었던 기 내 욕심이구. 연주 꿈을 기대로 두고봤어야 했더랬어. 연주는 첨 우리집에 왔을 때 밤마다 자기 사랑 얘길 늘어놨디. 전설 같은 얘기였어. 처녀시절 어느 부잣집 외아들이 자길 사랑했다는 게야. 자긴 천한 백정의 딸인데도 귀공자 같은 그 남자는 자길 죽도록 사랑했다는 게야. 대학 나온 부잣집 딸이 죽자살자 따라다녀도 거들떠보지 않고 말이디. 길코 남자 오마니는 자기를 며느리라고 불렀다는 게야. 우리 며느리, 이 세상에서 젤 예쁜 우리 며느리, 기랬다는 게야.
“그럼 왜 헤어졌을까?”
“남자가 죽었대. 기래서 정신이 잘못됐다는 게야.”
동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기봐. 슬프디? 나도 첨엔 에미나이 얘길 듣고 눈물을 흘렸더랬어. 암튼 연주와 사는 동안 내 투지가 녹은 게야. 고년이 집을 나간 후로 내레 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디. 기래서......”
“그래서 애들하고 병정놀이를 했나? 도로 무장공비가 되려구?”
“기거이 살 방법 아니갔어?”
동호는 배승태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바다에는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기래도 연주 땜에 잠시나마 행복했디.........”
“자네 잘못이 더 크네. 연주는 정신병을 앓았던 여잔데 자네가 끝까지 감싸줬다면 행복한 부부가 됐을 거라구.”
“내레 후회하는 거이 바로 기거야. 연주의 순결한 사랑을 이해 못하고 투기심만 생겨개디군 디립다 술만 퍼마신 거이 잘못이라메. 연주가 몸 버린다고 말리면 기러케 화날 수가 없었어. 술잔을 뺏으면 뺨을 치기도 하구. 내가 잠깐 미쳤더랬나 봐. 연주를 만나면 빌고 싶어. 지금 어드메서 멀 하는디 모르갔어. 몸도 성치 않아개디구.......”
“연주씨도 지금 자넬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암 때고 찾아올 거라구. 자네가 사랑하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꼭 찾아올 거야.”
“자넨 렛날이나 지금이나 날 슬프게 만드는군 기래. 나는 슬픔이 젤루 무서운데 말이디. 아궁이 앞에서 오마니 꿈을 꾼 것도 배라먹을 그 슬픔 때문일 게야. 눈발에 몸이 얼고 배가 고픈 데다 부뚜막 무쇠솥을 보니깐 어릴 적 생각이 났디. 오마니가 쪄주시던 고구마, 기거이 생각나니깐 왈칵 눈물이 나더라구. 긴데 말이디..... 연주가 날 찾아올까?”
배승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병정놀이만 안 하면 꼭 찾아올 거야.”
동호는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언제 나타났는지 수평선 멀리에서 택택이 두어 척이 아지랑이처럼 야울거렸다. 배승태는 그 작은 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잠을 깬 동호는 배승태와 함께 뒷동산에 올랐다. 바다가 잔잔한 탓인지 갈매기들의 날갯짓이 둔해보였다. 언덕에는 군데군데 참호가 숨겨져 있었다.
“저 참호레 사십 년이 훨씬 넘었을 거라메.”
배승태가 아직도 총구가 선연한 참호를 가리켰다.
“자네들 탓이지. 자네가 검거된 후로 참호가 생기고 나중에는 철조망이 쳐졌거든.”
“기놈들이 보고 싶군 기래. 어드러케 사는디 궁금해.”
갑자기 배승태의 얼굴이 밝아졌다.
“송두문 황억배 말인가?”
“기래. 참 맹한 놈들이었어.”
“좋아. 만나게 해주지.”
“데거! 데거! 신나는군 기래.”
배승태는 어린애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그들이 자네를 순순히 만나줄까? 자기들 약점 때문에 주저할 텐데?”
“원체 오랜 일인데 상관 있갔어? 내가 기네들을 여게로 초대하갔어. 안 오믄 찾아가디 머.”
“만나서 무슨 얘길 하려구?”
“할 얘기가 태산같디.”
“사실은 황억배를 만났었네.”
“머이?”
“자네 만났다는 말도 했어.”
“메라고 핸?”
“자네가 만나고 싶어한다 했더니 좋다고 그랬어.”
“송두문은?”
“황억배가 만나본다고 했어.”
“어케 살던?”
“송두문은 크게 성공하고 황은 빌빌대고.”
“기네들을 제꺽 만나고 싶군.”
배승태는 활기차게 앞장서 산을 내려갔다. 그의 발걸음이 쿵쿵 땅을 울렸다.
*
산이 새롭고 들이 새로웠다. 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송두문의 눈에는 산과 들이 옛날 육십년대의 풍광으로만 느껴졌다. 가끔 동해안을 찾아올 때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감회가 어린 적은 없었다.
진리포구를 떠난 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구나....
멀리 포구가 눈에 들어오자 송두문은 긴 숨을 내쉬었다. 포구에 세워진 모텔과 상가 건물을 보니 새삼 세월의 간극이 느껴졌다.
“옛집은 찾아보기 힘들구먼. 저 동산 너머에 우리가 살던 움막 터가 있을 틴디.”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황억배가 궁둥이를 들썩이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움막 터에다가 횟집을 냈다고 혔잖여. 그렁게 우리들 흔적은 암 것두 읎단 말여.”
“바다가 있잖은감.”
“옳은 말여. 바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잖은감.”
어느새 차는 철길 둑을 넘고 있었다. 진리포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노므 뚝은 그대로구먼. 원제 기찻길이 놔진댜? 일본놈들 레루나 깔아놓고 도망칠 거지.....”
송두문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일본놈들이 레루를 깔았으믄 뭔 소용여. 삼팔선이서 끊겼을 틴디.”
“멀잖어서 남북이 이어진당게 기다려봐야지.”
“금강산꺼정 배타고 왔다리갔다리 헝게 그럴 만도 허지.”
차가 카페와 횟집이 즐비한 동네 복판에 들어서자 항억배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모래톱은 주차장이 된 셈이었다. 동산 자락을 돌자 포구횟집이 보였다.
“우리가 살던 디가 저기구먼.”
황억배의 말에 송두문의 눈시울이 금새 뜨거워졌다.
미리 연락을 받고 포구횟집 앞에 나와 있던 동호와 배승태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횟집 방에는 푸짐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도방정을 떠는 게 사람 몸뚱어리여. 쬐끔만 더워도 헉헉대구 쬐끔만 서늘혀두 으등그리구.”
황억배가 마파람에 식어가는 비닐장판의 냉기를 그런 너스레로 표현했다. 그러자 송두문이 참견했다.
“으이구 미련한 놈. 궁뎅이가 차면 방석을 달라고 헐 거지 그러큼 말을 빙빙 돌려?”
“충청도 사람은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한다죠?”
동호가 분위기를 살리려고 끼어들자 배승태가 동호를 꼬나보았다.
“기거이 칭찬하는 거네 욕하는 거네?”
다분히 송두문과 황억배의 입장을 배려하는 역성이었다. 동호는 배승태의 포용력에 안심이 되었다. 사실 충청도 언어에 풍자성이 농후하다는 덕담으로 내놓은 말이지만 충청도가 고향인 두 사람한테는 섭섭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섭섭함을 배승태가 풀어준 셈이었다.
“욕이구말구쥬. 전직 형사가 헌 말잉게 참긴 혔지만 전직 간첩이 그런 말을 혔다면 당장 멱살을 잡었을 거유.”
“전직 간첩이 아니라 전직 무장공비죠.”
동호가 은근히 파고들었다.
“간첩이나 무장공비나 그게 그거 아니겄슈? 곰배팔이나 쩔뚝발이나 그게 그건디.”
예상한 대로 송두문이 동호의 말에 토를 달았다. 동호는 그걸 노렸다. 그가 자기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으며 배승태에게는 어떤 호의를 품고 있는지. 동호는 계속 송두문의 말에 곰파들 작정이었다.
“엄연히 다르죠. 곰배팔이는 팔 장애인이고 쩔뚝발이는 다리 장애인인데 팔과 다리의 기능이 다르잖아요.”
“기능이고 뭐고 간에 장애인 소리 듣기는 매한가지다 그 뜻이쥬.”
“얼래, 초판부텀 요상히 돌아가는 걸 봉게 오늘 포구횟집이 시끄럽겄는디. 이러다간 증말 두 양반이 멱살을 잡겄구먼.”
“기러믄 한판 붙어보라메. 기래개디구 렛날에 섭섭했던 속통을 제꺽 털어버리라요. 기래야 콩 하날도 한쪼박씩 노나먹는 형제가 되디오.”
“나로선 저분헌티 섭섭헝 게 읎어유. 내가 도둑놈 심보를 가졌었는디 워쩌자구 강 형사님을 원망허겄슈.”
“강 형사님이 아니구 강 사장님이랑게.”
황억배의 말을 송두문이 비틀었다.
“그거야 암케나 부르면 워뗘. 면장질이나 군수질 그만뒀어도 면장님 군수님 허잖여? 대통령을 그만뒀어도 각하각하 허구 말여.”
동호가 과분한 비유를 해줘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능청을 떨었다. 송두문은 이번에는 배승태를 향해 정중히 목소리를 다듬어냈다.
“그러구 배선생헌티 이참에 노골적으로 사죄를 허것는디, 증말로 죽을 죄를 졌구먼유.”
“죽을 죄? 기거이 멉네까?”
“내가 억탁 부린 걸 배선생도 잘 알잖어유?”
“기런 소리 말기오. 나한테 사죄할 거이 머 있갔소.”
“아니쥬. 자수나 마찬가진디 체포라고 빡빡 우겨서 상금꺼정 탔승게 그보담 더 큰 죄가 어딨겄슈. 지금도 그 생각만 허믄 오금이 저린다우. 저 친구 말대로 죽어서 불구덩에 빠질 죄쥬. 생사람을 잡어도 유분수지 아무리 돈에 환장혔기루서니 인두껍을 써가지고 그러큼 남을 모함혀 쓰겄남유.....”
“보시라요 송사장.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라요. 기때 송사장이 검거했다고 우겼으니께니 내레 안죽 살아있는 게야요. 먼 말인디 알갔시오? 정말이디 내레 자수한 기 아니야요. 총을 안 솼다고 자숩네까? 잠결인데 총을 안 쏠 수도 있잖습네까? 길코 총을 쏘든 안 쏘든 간에 내 맘을 내가 모르갔습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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