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걸로 병정놀이를 했나?
“그 후로 송씨는 한번도 못 만났나요?”
“그 친구가 고향에 내려오겠다고 동네에 기별을 넣으면 나는 일찌감치 숨어버리곤 혔어유.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 친구를 대면헐 수 없었쥬. 그려서 숨군 혔는디 친구는 그때마다 돈을 몇 푼씩 맡겨놓고 떠났걸랑유.”
“누구한테 맡기죠?”
“동네 이장헌티유. 허지만 절대로 그 돈을 찾지 않을 참유. 이장이 여즉 챙기고는 있는디 그 돈을 내 꺼라고 생각혀본 적이 한 번도 읎구먼유.”
“왜 찾아 쓰지 않았죠?”
“나도 사람 구실을 혀보고 싶은거유. 죽을 날도 멀잖지만 손주녀석이 곁에 있는디 인제 쓸개 읎는 짓은 안 헐라고 작정했슈. 그놈헌티 핼애비 몫을 혀야잖유. 또 그 돈을 가져다 뭐에 쓰겄슈.”
“나중에 목돈이 되믄 부락 기금으로 쓰도룩 허구 병구녀석 학비나 보태주라고 부탁헐 참이구먼유. 은행이자만 혀두 그럴 돈은 훨씬 넘을 팅게유. 하여튼 그 친구를 찾어가서 발이라도 씻겨주구 싶지만.....”
“두 분 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나야 죽일놈이쥬. 쓰레기만도 못헌 인간인디유. 쓰레기도 쓸모가 있는 세상인디 나는 그것보담 못허단 말유.”
황억배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동호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 옆에 놓인 텔레비전을 보았다. 화면에는 국회의원들의 얼굴이 비쳤다. 뉴스 시간마다 늘쌍 보아온 장면이었다.
“지겨운 쌍판들!”
구석 자리에 앉아 매운탕을 먹는 손님 중 하나가 침을 뱉듯 불만을 털어놓았다.
“쌍판을 한 대씩 갈겨줬으면 속이 시원하겠어. 저 인간들 땜에 온 사회가 뒤틀린단 말야.”
걸찍하게 뱉아낸 황억배는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장으로 보아 낚시꾼인 듯싶었다.
“그나저나 워찌 귀헌 발걸음을 허신 거래유?”
“사실은 두어 달 전에 배승태씨를 만났습니다.”
“배승태씨라뉴?”
“무장공비.....”
“오오라.... 그렁게 그 사람이 배승태였구먼. 인제 생각이 나는디, 그 사람을 워뜨게 만난 거래유?”
“우연히 만난 건데 그분은 아무 이유 없이 두 분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다 옛일인디 지금에 와설랑 뭣 땜에 보고 싶다는 거쥬?”
“그분 입장에서는 다만 옛 추억이 그리운 거겠죠.”
“얼래, 그 끔찍한 일을 추억이라뉴?”
“그러니까 더 진한 추억이 되는 거죠.”
동호는 얼추 토를 달아주었다. 배승태의 마음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힘들거니와 설명해봤자 황억배가 알아들을 리도 없었다. 동호는 그 정도로만 찾아온 뜻을 밝히고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
동호가 진리포구를 다시 찾은 것은 배승태의 전화를 받고 서였다. 진작 찾아가고 싶었지만 회사에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날자를 늦추다가 배승태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출발했던 것이다.
배승태는 동호가 도착할 시간을 예상했는지 미리 모래톱에 나와 있었다. 피서객이 북적대는 모래톱에 서서 연방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배승태는 동호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손을 흔들며 뛰쳐나갔다.
“세 번째 나와본 게야. 늦게 도착할까봐 조마조마했디.”
동호는 배승태가 왜 조바심을 냈는지 창고방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널다란 교자상이 놓여 있고 백지를 깐 상에는 불고기, 생선회, 홍어무침, 매운탕, 게찜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웬 음식이냐는 동호의 물음에 배승태는 벙그죽 웃기만 했다. 그때 술병을 들고 방에 들어선 포구횟집 영월댁이 동호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간 후에야 배승태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털어놓았다.
“자네와 오붓이 지내고 싶었더랬어. 렛날로 돌아가구 싶었디.”
동호는 우선 배승태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생일을 축하했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주름살이 깊은 그의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날카로운 독기를 뿜어대며 철책 안에 꼿꼿이 앉아 있던 그의 살기찬 모습은 이제 전설 속에 묻혀 버린 꼴이었다. 전설, 그렇다. 두더지보다 더 빠르게 땅 속에 묻히는 엄폐술, 어둠 속에서도 단발의 총알로 필살하던 사격술, 그런 팽팽한 생존조건은 이제 그만의 전설이 되었다.
“자네도 많이 늙었군.”
동호가 자상한 눈길로 우정을 표시했다.
“아냐. 내레 젊어지구 있어.”
“그래야지. 늙을수록 젊게 살아야지.”
“이걸 보라메.”
배승태는 벌덕 일어나 웃목 구석에 펼쳐 있는 파란 비닐을 거둬냈다. 비닐 속에는 낯익은 물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권총과 수류탄만 모조품이고 군복, 군화, 군모, 나침반, 쌍안경, 잭나이프 수통 등 의복과 장비는 모두 진품이었다.
“동대문시장에서 구했디.”
“확실히 미쳤군.”
“자넨 이런 놀이가 시시하겠디만.......”
“그럼 저걸로 병정놀이를 했단 말인가?”
“첨엔 오해를 받았어. 지서에 끌려가기두 하구. 동넷사람들은 미쳤다구 하구. 기럴 만도 했디. 늙은이가 저런 복장을 하고 꼬맹이들과 포복으로 뒷동산을 누볐으니깐 오죽 꼴불견였겠어. 하디만서두 난 말이디, 기런 짓을 해야 사는 맛이 생기거든. 피가 홱홱 돌아서 몸이 근질근질해진다구. 왜서 기런디 알간?”
“한창 젊었을 때의 추억이라 그러겠지.”
“젊어서가 아니라메. 가장 긴장된 생활이라 기래. 긴장된 순간에서만 사는 의미가 느껴지거든. 사는 목적 말이디. 사람이 산다는 거이 머갠? 짐승처럼 먹을 것만 잔뜩 챙겨두는 거이 사는 게가? 먹는 음식만 해도 기래. 내가 지금 이 생일상 음식이 더 맛있갔는가 자네가 철창 안에 몰래 넣어주던 빵쪼각이 더 맛있갔는가. 자네가 몰래 갖다주던 담배와 술맛은 자네도 모를 게야. 박카스병에다 담아온 소주를 마시던 재미를 내 평생 어케 맛보갔어. 기때 자넨 참 간덩이가 컸더랬어. 참 별난 형사랬어.”
“이제부턴 마음을 열고 살지 그래. 과거에만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이해하며 살란 말야.”
“내레 세상을 넓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 기래서 IMF시대를 걱정했구, 고이즈미 수상이 왜서 한국에 왔는지를 생각했구, 길코 지금이 공상과학시대구, 부패시대구, 자본주의 몰락 시대란 것도 잘 안다구.”
“자본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지.”
“기거나 이거나 매찬가디야.”
“세상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 자넨 지금 점점 굴속으로 숨어들고 있어. 삼십사 년 전으로 말야.”
“그 시절이 젤루 행복했더랬어. 기러니께니 기때로 돌아가고 싶은 거디.”
“그때가 그리 좋은가?”
“기럼.”
“좋아. 그럼 함께 그때로 돌아가자구.”
동호는 이야기가 잘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승태가 여태까지 숨겨온 비밀을 캐고 싶었다. 어부에게 총을 빼줬으면서 왜 자수할 의사가 없었다고 우겼는지.
“자네 옛날처럼 긴장하며 살고 싶댔지?”
“기럼.”
“그렇다면 내 취조를 받아보겠는가? 그때처럼?”
“기거 좋디. 아주 신나는 장난이군 기래.”
“장난이 아냐. 내 신문에 똑똑히 대답하라구.”
“말해보라우.”
“배승태, 삼십 사 년 전엔 뭘 했지?”
동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서 기런 걸 묻네?”
“잔말 말고 대답해!”
배승태는 갑자기 굳어진 동호의 표정에 놀라 마지못해 대답했다.
“무장공비디 머갔어.”
“무장공비란?”
“북에서 남파된 정예 전투요원.”
“남파 목적은?”
“거점을 확보하여 후방을 교란시키려구.”
“그보다 더 큰 목적을 말해!”
“적화통일이디 머갔어.”
“자수했나 검거됐나?”
“검거됐디.”
“검거? 검거가 확실해?”
“확실하다말다.”
“그럼 총은 왜 빼줬나?”
“기건 모르갔어. 왜서 기랬는디..... 기땐 정신이 맹해개디군.....”
“정신이 왜 맹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
“자넨 그때 얼마든지 어부들을 처치하고 도주할 수 있었잖아.”
“단박에 백 놈은 요절낼 수 있었디.”
“그래 맞아. 일당백으로 싸울 수 있는 살인 전문가 아닌가. 그런 자네가 총을 빼준 걸로 보아 분명 자수할 의향이었어. 그런데도 검거됐다고 우긴 거야.”
“.....”
“과거는 어쨌든, 이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게.”
“지금 대답하라면 자수가 맞디.”
“그럼 어째서 옛날엔 검거됐다고 우겼지?”
“기땐 살고 싶었더랬어.”
“그게 뭔 소리야? 검거됐다고 우겼으면서 살고 싶었다니?”
“변절이 사는 게가?”
“그럼 지금은 죽고 싶어서 자수라고 하는 거야?”
“기럼.”
“변절했다는 말이군?”
“변절이 아니고 아주 썩은 게야. 고노므 계집 때문이디. 고년을 만나기 전만 해도 살 의욕이 철철 넘쳤더랬어. 도화와 헤어지고 강식이 사라졌어도 통일전사로서의 긍지를 잊은 적이 없었으니께니. 물론 외로울 때가 있긴 했디. 달이 휘엉청 밝을라티면 가슴이 찢어질 때도 있었어. 기때마다 여게로 침투한 때를 생각했디. 기땐 꿈이 있고 용기가 솟았거든. 기래서 여게다 자리를 잡은 게야. 여게 살면 침투할 때처럼 늘 정신이 팔팔하거든. 기런데 연주년이 나를 타락시킨 거라메.”
“연주?”
“고노므 계집이 연주야. 나를 환장하게 만든 년이디. 바지런하구, 착하구, 예쁘구, 게다가니 슬픔까지 녹아개디구선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어. 몸을 섞고 나니께니 더 기가 막혔디. 몸도 솜털 같고 백합처럼 고왔어. 육십 넘은 내가 이틀이 멀다하고 껴안았으니깐 오죽 탐나갔어. 세상이 온통 꽃밭처럼 고와보였디. 내 옷차림도 화려해디구, 음식도 맛있어디구, 집안도 깨끗해디구. 기것뿐인 줄 아네? 나한테 정을 붙이려고 화장도 곱게 하구 맵시도 다듬었디야. 덩말 천사 같았어. 게다가니 생글생글 눈웃음치는 걸 보믄 오장육부가 질퍽하게 녹았더랬어. 하루가 어케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디. 기런데 말야......”
배승태는 냅다 술잔을 집어 연거푸 두 잔이나 들이켰다.
“알고보니께니 연주년이 나한테 정이 있어 잘한 게 아녔어. 고년은 꿈을 꿨던 게야. 렛날에 미쳐지내던 남자가 있었더랬는데 나를 그 남자로 착각한 거디. 이런 말을 하더군. 어머니께선 당신 맘이 내게 돌아설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기러더라구. 첨엔 기런 말을 하길래 나도 착각했디. 아궁이 앞에서 졸 때 현몽하셨던 오마니가 연주한테도 현몽하셨구나 착각했더랬어. 내레 연주년한테 속은 거라메. 길코.....”
“잠깐! 어머니가 현몽하셨다니? 아궁이 앞에서 졸 때 꿈을 꿨는가.”
“꿨더랬디.”
“그 꿈 얘기를 자세히 말해주게.”
동호는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일로 의심해온 검거 사실을 그 꿈에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지 싶어 흥분했는데 배승태는 할 말이 없다며 자꾸 다른 말을 지껄였다. 동호는 술상에서 돌아앉아 바다를 내다보았다.
“와 기러네?”
“이제와서 그 따위 꿈 얘기가 그리도 대단한가? 나를 친구로 여긴다는 말도 죄 헛소리었군.”
“시시한 꿈 얘길 개디구 자꾸 와 기러네?”
“시시한 얘기든 중요한 얘기든 내가 듣고 싶어하잖아.” 동호는 꿈 이야기를 안 해주면 당장 서울로 돌아가겠다며 윽박질렀다. 어떻게든 그 꿈의 내용을 알고 싶었다. 호기심에서가 아니었다. 체포논리를 뒤엎을 석연찮은 정황들이 모두 그 꿈속에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배승태의 석연찮은 체포논리 속에는 검거 정황을 돌출시킨 어떤 기제(機制)가 도사리고 있을 터인데 동호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권총을 탈취 당했을까, 탈취 당할 상황이 아닌데 어째서 그랬을까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정황의 실체를 파악하지 않고는 배승태의 솔직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배승태가 병정놀이를 하는 데다 연주와의 관계까지 겹친 상태이니 더욱 그의 솔직한 면을 알아야 했다.
“말해주게! 자네의 꿈속에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숨겨져 있는진 몰라도 끝내 숨길 경우 자네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네. 나는 친형제네 집에서도 잠을 잔 적이 없어. 그처럼 까탈스런 내 성미인데도 자네의 냄새나는 방에서 함께 자려고 여기를 찾아왔잖은가. 그런 나한테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자네도 그 엄혹한 시절에 사법경찰관인 나한테 위태로운 말을 털어놨잖은가. 만약 내가 자네를 증오했더라면 무슨 수로든 극형으로 몰고 갈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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