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5회)

충남시대 2023. 10. 31. 10:22

죄와 야비


  “내가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동호는 침착하게 말을 엮어나갔다. 
  “방금 배형이 한 말은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배형의 속맘은 절대 자수할 의향이 아니었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배형 입장에서는 자수논리보다 체포논리가 합당했다는 말이죠. 체포로 우겨야 이북 가족이 무사할 수 있는 데다 자수는 바로 배승태란 사람의 진정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배형은 지금도 그 투쟁의지에서 뭐랄까.....”
  동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송두문이 불쑥 아는 체를 했다. 
  “투쟁으로 말한다치믄 사람 사는 게 죄 투쟁일 틴디유? 장사도 투쟁이구 농사도 잡풀이나 벌레와 투쟁허는 거구.”
  “그 투쟁과는 다르죠. 배형의 투쟁은 전략이나 전술처럼 살아가는 방편이 아니고.....” 
  “얼래, 증말로 두 분이 끝을 볼 참인감유?”
  황억배가 농담 삼아 끼어들자 동호가 그의 말을 잘랐다.
  “싸우는 게 아닙니다. 배형이 왜 두 분을 좋아했으며 여기로 초대까지 했는지 그 심정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배형은 정말 두 분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때의 추억이 오죽 그리웠어야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겠습니까. 이 포구횟집이 바로 두 분이 사시던 움막 텁니다.”  
 “정말이야요. 여러분을 만나니께니 살맛이 나디요. 기럼 기럼 살맛이 나구말구디.”  
  술잔을 얼른 비운 배승태가 빈 잔을 송두문에게 건네주고 연방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모두 여게 모여 삽시다레. 송두문 동무나 황억배 동무도 그 시절이 그리울 겁네다.”
  “그리운 게 뭐유. 고생바가지만 뒤집어쓰고 살었는디유. 그러구저러구 동무동무 허는 걸 봉게 배형은 아즉두 빨갱이구먼?”  
   황억배가 끼어들었다.
  “황형하구 송 사장은 반동분자군 기래.”
  “그럼 나는 뭔가?”
  동호가 웃음을 날렸다.
  “얼래, 그러구봉게 우린 모다 빨갱이니 반동분자니 허구 감투를 썼는디 강 사장만 감투가 읎구먼.”
  “감투가 워째 읎겄어. 형사가 감투지.”
  어느새 술판에는 존칭어가 사라지고 나이와 신분을 떠나 친구처럼 어울렸다. 
  “자 술들을 드시구래. 코가 배틀어지게 취하기오.”
  배승태가 빈 잔마다에 술을 채우며 흥을 돋았다. 동호도 거듭 술잔을 비우며 잔을 돌렸다.
  “그려 그려. 한번 원읎이 마셔보자구.”
  송두문이 고개를 세워 수평선에 떠 있는 어선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물을 거둬올리고 있겠지.....
  “배 선생.”
  송두문은 조용히 배승태를 불렀다. 
  “왜서요?”
  “실례 말씀을 드리고 싶은디.....”
  “하시라요.” 
  “들어서 아시겄지만 내가 몇 푼을 번 것 같은디, 배선생헌티 쬐끔이라도 보답허구 싶어서유.”  
  “고맙수다래. 하디만서두 느닷없는 일이니께니 말미를 주시구래.”
  “그러지유. 고맙구먼유.”
  “기런데 왜서 자꾸 부담을 느낍네까? 내레 송 사장한테 빚을 진 기야요. 알갔시오?”
  “그게 무슨 말이래유? 나헌티 빚을 지다뉴?”
  “아까도 말했디만서두 기때 송사장이 검거라고 주장했으니께니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됐다 기겁네다.”
  “무슨 말인지 도통.....”
  “기러케만 아시구레. 내가 빚을 졌다고 말이외다.”
  “하여튼 그런 어구낭창헌 말은 마시구 진솔히 생각 좀 혀줘유. 그래야 내 가슴에 박힌 못이 빠질 팅게유.” 
  “송사장, 정말이디 실망이 큽네다. 내레 송사장이 정말 사기꾼이길 바랬시요. 여게 황선생이나 강 사장도 마찬가집네다만 솔직히 여러분들 땜에 실망이 큽네다.”
  “실망이 크다니?”
  동호가 정색을 하며 배승태를 바라보았다. 배승태의 말이 생경했던 것이다.
  “여러분들이 너무 착하다 그 말이디.”
  “착한 게 어때서?”
  “여게 사람 같지가 않아서 기래.”
  “여기라니?”
  “대한민국이디 어디갔어.”
  “그럼 여기 사람들은 어떤데?”
  “너무 약삭빠르디. 기래서 여겐 짜릿한 기 없어.”
  “짜릿? 감동 말인가?”
  “기래. 감동할 게 없으니께니 살맛이 없는 게구. 살맛이 없는 데서 먼 재미로 살간.”
  “그럼 북쪽은 살맛이 나는 곳인가?”
  “북쪽도 살맛나는 곳은 아니디. 기래서 북쪽도 싫어. 하디만서두 북쪽은 살맛나게 가꿀 수 있는 곳이라메.”
  “여기도 살맛나는 곳으로 가꾸면 되잖나?”
  “여게는 가꿀 수 없는 땅인 게야. 아주 오염된 땅이라 새순이 날 수 없어. 하디만 북쪽은 미개척지니께니 가꿀 수 있는 땅인 게야. 내 말 알간?”
  동호는 그의 말에서 점점 흥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미개척지가 무슨 뜻이지?”
 “미련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디.”
  “미련한 사람?”
  “미련한 사람은 단순하니께니 잇속을 잘 챙기지 못해. 한마디로 순수한 게라구.”
  “그럼 북쪽 사회가 순수하다 그말인가?”
  동호가 곰파들었다. 
  “기건 아니라메.”
  “그게 아니면..... 자네 말은 종잡을 수가 없잖나?”
  “내가 말한 순수는 뜻이 좀 달라. 내 말은 남쪽이나 북쪽 모두 타락했디만 차이가 있다 그 말이디. 죄와 야비의 차이점 같은 게야.”
  “죄와 야비?”
  “죄는 벌을 받을 수 있는 타락이지만 야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없는 타락이다 기런 말이디.”
  “어려운 말이군.”
  동호는 말뜻을 알 것 같으면서도 배승태의 해괴한 말이 흥미있어 보여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배승태는 자세를 곧추 세우고 나서 차근차근 말을 엮어나갔다. 그의 말을 간추리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죄와 야비는 다 같이 타락의 일종이지만 본질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토를 단다면 죄는 한마디로 철이 없는 무작위적 타락으로서 속빠졌다, 미련하다, 순진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락이 뭔지 모르고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야비는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서 눈치 있다, 능숙하다, 약삭빠르다, 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타락이 뭔지 잘 알면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불가능하다. 
  색깔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가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그렁게 저쪽은 죄고 이쪽은 야비다 그 말이네유?”
  “기러티오. 송사장은 말귀가 밝습네다. 여게 사람들은 인간적인 덕목을 촌스럽게 여길 정도로 야비해졌습네다. 여게는 인간이 얼마나 야박한지를 측정하는 실험실인 게야요. 아주 무서운 곳이디오. 야비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곳이다 기런 말입네다.”
  “다 그렇지는 않지.”
  동호가 억지스런 주장이라며 끼어들었다. 
  “길세 다 기러케 된다니깐 기러네. 기래야 대접받고 살 수 있으니께니 사회가 더 야비해질 수밖에 없다 기런 말이디. 알간? 물론 송 사장이나 황형이나 자네처럼 양심을 지키는 사람도 있긴 하디. 하디만 여러분들의 그런 양심도 이기적인 순결에 불과하외다.”
  “그럼 자네들의 순결성은 이타적이란 말인가?”
  “기러티. 내 투쟁이 변함없고 선명한 것도 기래서구.”
  “그래서 반세기만에 혈육을 만난 자리에서도 장군님만세를 외쳤나? 그런 집단적 광기를 이타적인 순결성과 결부시켜?”
  “기걸 비웃지 말라우. 기러니께니 죄라고 말했잖갔어? 기러니께니 미개척지라고 말한 게구.”  
  배승태는 입을 다물었다. 동호는 배승태의 말을 더 듣고 싶어 귀를 모았지만 그는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동호는 금세 입맛이 깔깔해졌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연주에 대한 죄책감이 배승태 말마따나 한갓 자기애적 자존심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호는 금세 배승태의 얼굴이 낯설어보였다. 배승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멍하니 앉아 침묵만 지키던 동호는 고개를 들어 송두문과 황억배의 표정을 살폈다. 송두문은 가만히 앉아 두 눈만 끔벅거렸고 황억배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술잔만 바라보았다. 

  *

<나연주>                        
 58세.  미모   
 고교 1학년 때 강간당한 후로 한 때 정신 이상. 그 후로 동호 부부의 극진한 배려로 점차 나아지고 있다.    
   
 <배승태>  
 68세. 미남형  
 이북에서 대학에 다님. 북한에 예쁜 아내와 아들을 두었고 그들을 항상 그리워함. 무장공비로 복역. 하지만 연주와 새 삶을 살고 싶어한다.
    
  동호는 구체적으로 양측을 검토해봐도 뾰족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북통일은 아직 멀 테니 배승태 생전에 이북의 윤희정과 지낸다는 건 기대할 수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윤희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질 거고 연주 역시 배승태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생길지 그게 모를 일이었다. 다만 배승태가 양심적인 인간형이어서 연주를 불행하게 만들 남자 같지는 않아 다소 마음이 놓이긴 했다.  
  배승태는 파도를 보며 생전 처음 슬픔을 느꼈다. 바다를 산과 같이 투쟁의 무대로만 여겨온 그로서는 너무 뜻밖이었다. 낭만이나 슬픔 따위는 그에게 있어 버려야 할 쓰레기였다. 그 유치한 감정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늙은 몸으로 병정놀이까지 했잖은가. 그런데 파도 따위를 보며 슬픔을 느끼다니, 배승태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입을 앙다물었는데 그 순간 어이없게도 눈물이 쏟아졌다. 배라먹을, 배승태는 자기의 의지와 감정이 서로 겉돌고 있다는 데에 부아가 나고 또한 두려웠다. 
  강 형사 기놈이 마약인 게야. 기놈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디. 도대체 기놈은 어떤 놈이가? 렛날에도 나를 미치게 했더랬는데 지금도 나를 미치게 만드는군. 도대체 기놈은 왜서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게가? 기놈한테 귀신이 씐 게가? 
  배승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결이 얼굴을 시리게 얼릴 만큼 쌀쌀했다. 벌써 늦가을이었다. 또 한해가 저무는군. 그는 뭔가 한 줌 쥐고 있던 걸 흘리는 낭패감이 느껴졌다. 이북 가족에 대한 상념이 슬펐다. 이제는 뭘 그리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배승태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연주와의 재회뿐이었다. 연주와 부부연을 맺으면 누구보다 행복할 것만 같았다. 
  “왜서 이리 늦는 게야. 제꺽 나타나딜 않구.”
  배승태는 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주를 태운 동호의 차가 강릉쯤 지나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터라 더욱 조바심이 났다. 그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 배승태는 바다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면사포를 쓰고 바다 위를 거니는 연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