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회)

충남시대 2023. 11. 14. 14:55

K시 시장 딸이 찾아오다


“뭐라고요? 민주가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꼽추가 된다고요? 그럼 민주한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신세 망친다고요.”
  핸드폰을 들고 그런 식으로 공갈을 치면 민주는 꼼짝없이 내 애인이 되고 만다, 신나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그 상상은 부산중학교에 다니고부터 이루어질 기미가 보였다.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도 산에서 나무만 하던 내가 부산에서 제일 명문인 부산중학교 학생이 되었으니 민주로서는 넋이 나갈 수밖에.  
  이제는 민주가 애간장을 녹일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중학 졸업반이 되자 가슴이 더 풍만해지고 눈꼬리로 비나리칠 줄 아는, 기막힌 여학생으로 성장했지만 내 급상승한 권위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민주는 고교 진학이 불가능한 처지였다. 고교생이 되려면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딸 혼자 도시로 나가는 걸 허락할 부모가 아니었다. 
  “방학 때마다 꼭 귀향하라구. 알지?”
  날이 갈수록 민주의 유혹은 극성을 부렸다. 내 겨드랑이 털과 사타구니 털이 일찍 까매진 것도 그 달콤한 유혹 탓이었다.

  *

  나는 70대 중반에 접어들자 평생 써온 일기를 정리하면서 함가현 장군, 조성구 박사와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60년 동안 써온 일기를 어떤 식으로 정리할지 고심이 컸던 것이다. 
  “소설로 꾸미면 어떨까? 소설 장르가 해체되는 시대잖아.”
  “그렇다고 일기대로 쓰면 소설이 되겠어? 일기마다에서 재밋거리를 캐야만 소설로 형상화할 수 있지.”
  조성구의 말에 함가현은 소설이 재밋거리냐고 따졌다.
  “이 친구야, 요즘 세상에 재미없는 걸 누가 읽어.” 
  “재미로만 치면 웹툰 같은 게 더 재밌잖아.”
  “내가 말한 재미는 문체를 의미한 거야. 예를 들어 해학성이 농후한 문체랄까.” 
  “앞으로 AI소설이 판칠 텐데 순수한 작품이 견뎌내겠어?”
  “순수한 작품은 계속 살아있을 거야. AI소설이 판칠수록 인간의 체취가 묻어있는 작품이 그리워질 거라구. 인간이 쓴 명작은 고전이 된다는 말이지.”
  “참, 너희들한테 알려줄 게 있어.”
  잔아가 두 친구를 주목시켰다. 
  “어저께 문호교회 목사님이 박물관에 들렀는데 내 필명 잔아(殘兒)에 대해 묻는 거야. 잔아의 뜻을 알고 지었냐고. 그래서 뜻을 모르고 지었다고 하니 목사님은 잔아가 기독교의 중심사상이라는 거야.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난 가족도 잔아고, 앞으로 심판 날 구원받을 사람도 잔아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잔아시라는 거야. 그러면서 모르고 지었다면 참으로 묘한 섭리라고 했어. 우연 치고는 놀라운 우연이란 거지.”
  “섭리?”
  조성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애초에 필명을 잔아로 바꾼 까닭을 캐물었다.
  “잔아를 직역하면 ‘남은 아이’가 되고 의역하면 ‘마지막 아이’가 되는데, 그 의역이 많은 호평을 받았어. 한문이나 영어로도 어감이 매끄럽고.”
  “그러고 보니 매우 의미심장하군.”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필명은 원래 등단 초부터 사용하잖아. 그런데 내 경우는 늘그막에야 바꿨으니 일기 시작 무렵에는 김용만(金容滿)으로 써야할지....”
  “아냐. 일기 시작 무렵인 오륙십년 대에도 잔아로 써야 독자들의 혼란을 막을 수 있어.”
  조성구의 말에 함가현도 동의하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인터넷 시대 이전의 일기에서는 잔아란 이름이 낯설 거야. 잔(殘)씨 성이 없으니까.”
  “괜찮아. 세월이 약이야. 백년만 지나면 20세기 중반이나 후반이나 그게 그거야. 요컨대 20세기 중반은 인터넷 시대의 태동기여서 잔아든 칸아든 뽀아든 상관없다는 말이지.”
  조성구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1957. 1. 9

  수업을 끝내고 ‘유엔 가입 궐기대회’에 참석했다.

  저녁에 강좌를 다녀와서 부산역으로 박 선생을 마중나갔다. 독도를 처음으로 측량한 박 선생은 정부 공보실에서 발간한 해외 홍보책자에 독도 측량 모습이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 그가 서울 출장이 잦은 것은 김중업 건축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파리건축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하바드대학교 건축대학원 객원교수를 지낸 김중업은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박 선생은 집 주인 겸 내 학습을 지도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나를 자식처럼 돌봐주신다. 너무 고마운 분이다. 
  

1957. 1. 26

  완연한 졸업 기분이다. 급우들로부터 졸업 Sign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이 영화를 보자며 나를 중앙극장으로 데려갔다. 
  “<7인의 신부>는 유명한 영화인기라. 그라고 늬캉 헤어지모 언제 또 만나겠노. 용산고 함격하모 서울에 있겠지만도.”  
  “와 못 만난다카노. 앞길이 창창하구마.”
  “늬 사투리 들으니까네 부산 사람 다 됐다이.”
  “너희들이 나를 잘 대해줘서 동화된 거겠지. 여름방학 때 놀러와. 우리 마을 자락에 호수도 있으니까 뱃놀이도 할 수 있어. 경상도에 경주가 있으면 충청도에는 부여가 있지.”
  “부여는 백제패망의 한이 맺힌 곳 아이가?”
  “그러니까 슬픈 곳이지. 너희들도 슬픈 곳이 어떤 곳인지 알 거야. 비극미를 지닌 곳. 그러니 부여가 가장 예술적인 고장이지. 셰익스피어 4대비극이 왜 영원한 명작이냐면 비극미를 지녔기 때문이야. 그래서 느낌이 다른 거구.” 
  “잔아 늬한테는 경주도 느낌이 다를 끼다. 우리가 늬 고추를 꺼내봤으니까네.”  
  3학년 전체가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떠날 때였다. 열차를 타고 가는데 짓궂은 친구들이 졸고 있는 나를 좌석에 뉘어놓고 몰래 바지 지퍼를 열었던 것이다. 
  “늬는 와 그리 신경이 무디노. 계속 코만 골데이. 그라이 멍청도 소리 듣는기라.”  
  “병신들, 네놈들이 속은 거야. 이미 잠을 깼지만 네놈들이 내 고추를 가지고 어떻게 장난치는지 살피려고 자는 척한 거라구. 그래 내 꺼가 네놈들보다 작든 크든?”
  “겨드랑이가 까마니까네 당연히 컸지러.” 
  “장가든 몸이라 엄청 컸을 거야.”
  “뭐라카노? 늬가 장가든 몸이라꼬?”
  같은 반 이동주가 캐물었다.
  “그래.”
  “하기사 우리 어무이도 열다섯 살에 시집오셨다 카더라.”
  “우리 어머니는 열네 살에 시집오셨어.”
  “충청도가 더 빠르네?”
  “말은 느려도 행동은 빠르다구.”  “늬 말이 맞다마. 촌놈!”
  “바로 어제 편지가 도착했어. 졸업하면 퍼뜩 귀향하라는 거야. 보고 싶어 환장하겠다고.”
  “와이프가 편지를 보냈따꼬?”
  “와이프는 아냐.”
  “늬 방금 장가 들었따꼬 말했잖나.”
  “장가갔다는 말은 조숙하다는 뜻이었어.”
  “그라모 어제 도착한 편지는 머꼬?”
  “누나 친구였어. 나보다 두 살 윈데 암호를 보냈던 거라구.”  
  “암호?”
  “겨울방학에 귀향을 못했으니 졸업하자마자 귀향하라고 썼는데, 그 말은 ‘봄방학 때 포옹하자’는 암호였어. 민주는 열아홉 살이니 남자에 미칠 나이지.”
  “누나 친구 이름이 민주나?”
  “그래.”
  “지금 연애하모 우짜노. 그래갖고 우째 용산고에 합격하겠노.”
  “맞는 말이다. 그래서 겨울방학에 귀향을 포기했던 거야. 그 바람에 민주는 더 환장할 테고.”
  “여자가 억세게 대들모 우짜겠노. 하지만도 합격은 꼭 해얀다카이. 늬 팔자니까네 늬가 알아서 하겠지만서도, 당연히 만남을 삼가야제.”
  “고맙다. 합격할 때까진 민주를 만나지 않을 거야.” 
 

1957. 2. 5

  2학기에는 71명 중에서 29등을 했다. 일류학교는 실력이 비슷비슷해서 1학기에 1등한 학생이 2학기에는 20등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부산중은 과연 실력 있는 학교다.


1957. 2. 21

  입학원서가 왔다. 600명 모집에 540명은 용산중학에서 뽑고 나머지 60명만 타교생으로 뽑는다니 합격은 하늘에서 별 따기다. 

  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입초경찰관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부터 치안국(경찰청)에서는 파출소 주간입초를 폐지하고 야간에만 입초를 서기로 했단다. 언제 입초근무가 폐지될지 모르지만 파출소 근무자가 젤 싫어하는 업무가 입초근무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