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1957. 3. 2
졸업식 날이다. 꽃다발이 운동장을 메웠는데 나만은 아무도 없다. 이동주 가족들이 위로해주었다. 혼자 고교입학원서를 들고 그리운 교문을 나왔다. 밤에 서울행 급행열차를 탔다.
1957. 3. 13
어제부터 오늘까지 필답고사를 치렀다. 내일 면접과 신체검사를 끝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필답은 자신 있게 마쳤지만 7대1의 어려운 비율을 과연 돌파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런데 운이란 게 있나보다. 내가 자신 없는 과목은 생물인데 한강로 누나 집에서 남영동 용산고 입구까지 전차를 타고 가면서 읽어본 ‘멘델의 법칙’이 그대로 나와 무난히 써낼 수 있었다.
1957. 3. 16
학교 2층 벽에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다. 31번, 48번, 57번.... 그 중에서 48번을 다시 확인했다. 합격! 충청도 촌놈이 대한민국 ‘4대공립’에 합격했다.
1957. 3. 18
정부에서는 통행금지 시간을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단축했다.
1957. 3. 26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로 입적시켰다. 이기붕은 한국의 넘버 투 맨이 되었다. 대한민국 꼴이 점입가경이다. 야단이다.
보리밭을 판 돈으로 등록금 90,000환을 납부했다. 이제 밭농사 지을 농지는 손바닥만 한 채전뿐이다.
1957, 3. 31
석양을 밟으며 함박산 모퉁이를 돌아가니 누나가 어찌 알고 논길을 질러 뛰어왔다. 가방을 누나에게 건네고 앞장서 걷는데 누나가 연방 떠들어댔다.
“너 김혜연이 알어? 고개 너머 참봉네 손녀딸 말여. 아버지가 시장인디 너도 그 기와집을 구경한 적 있을 거야.”
내 귀에는 누나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대도시 시장 딸이지만 일류학교 합격자로 가슴이 부풀어 있는 내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집집마다에서 울타리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1957. 4. 1
아침 늦게 잠이 깼을 때 교복차림의 여학생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문틈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졸업반인 그녀는 교회에 다녀오겠다며 금방 누나와 헤어졌다. 누나가 방문을 활짝 열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너를 만나보고 싶대.”
누나의 그 화려한 목소리에는 이권(利權)이 묻어 있었다. 시장 딸이라는 호칭을 여러 번 되뇌었는데 아마 동생의 일류고등학교 합격을 상품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혜연이랑 좋은 인연 맺어지면 얼매나 좋겄냐.”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얼래. 식구끼리 그런 말도 못 혀? 너도 클 만큼 컸잖은감? 네 꿈도 좋지만 인제 우리 집 형편을 보란 말여.”
“그럼 시장 딸이라고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거야?”
나는 언성을 높인 게 미안해서 가벼운 웃음을 날렸다. 동생을 끔찍이 여기는 누나의 기대치를 차마 뭉갤 수 없었다. 갑자기 누나가 가여워졌다.
“내가 출세해서 누나 소원을 풀어줄 테니 아무 걱정 마.”
“혜연이와 인연을 맺는 게 내 소원을 풀어주는 거여. 그보다 더 좋은 실속이 어딨어.”
“애정 따위는 상관 없구?”
“애정이 밥 먹여주남? 혜연이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미인이라구.”
나는 일부러 누나에게 미소를 날려주고 해묵은 책과 노트를 정리했다. 방안에 가득 쌓인 초등학교 시절 노트와 폐지를 마당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때 또 혜연이 나타났다. 누나가 나를 동생이라고 소개하자 “아 합격하신 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운 눈동자, 고운 얼굴, 고운 살결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혜연의 미모에 홀려 말이 더듬거렸다.
“늦잠 자느라 아직 세수를 못했습니다.”
“세수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한데요.”
혜연의 웃는 모습이 눈부셨다. 혜연을 안방으로 안내한 누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에 쑥버무리와 백김치를 차려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세수를 마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혜연과 마주앉고 싶었지만 무슨 말로 대화를 나눌지 몰라 멀찍이 피해 앉았다. 못난놈! 이동주한테 연애 기술을 배울 걸. 이동주가 여학생 꼬시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마다 왜 유치하게만 들렸던가! 이동주의 섹스란 말이 왜 그리 거슬렸던가! 미국 영화 <랩소디> 감상을 떠들 때도 왜 한 귀로 흘렸던가! 왜 존재니 당위니 허무니 그런 무거운 말에만 매력이 느껴졌던가!
“넌 워째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여? 혜연이와 얘기 좀 나눠봐. 부산서 굴러먹은 실력을 발휘해보란 말여.”
누나의 넉살 좋은 말에 혜연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나도 멋쩍게 웃어주었다. 연애라곤 해본 적이 없는 나 자신이 창피스러웠다. 그러고보니 민주와도 연애로 맺어진 게 아니었다. 연애 방식대로 절차를 밟아 정을 통한 게 아니라 벌거벗은 민주의 요구대로 올라탔을 뿐이다. “내 몸 위에다 네 몸을 포개봐.” 내가 떨리는 몸을 민주의 몸 위에 포개자 “가만히 있지 말고 네 멋대로 비벼봐.” 하고 재촉했다. 민주의 그 말이 꽃뱀의 혀처럼 요사스러웠다. 애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는데 비벼보란 말을 들으니 사지가 떨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공포심이었다. 훗날에야 그 공포심이 황홀경이란 사실을 깨달았지만.
“혜연이 앞이라 덜덜 떨리는 모양인디, 기왕이면 꽁꽁 얼어버려. 혜연이가 녹여줄팅게.”
혜연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는 누나의 당돌한 말이 민망했다. 누나가 뭘 노리고 저런 말을 하지? 나는 혜연의 표정을 살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시험공부 땜에 진짜공부를 못했습니다.”
내 말에 누나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얼래, 이제야 입이 열렸구먼? 그럼 이번에는 혜연이가 동생 말을 받아줘봐.”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낯선 말을 꺼냈다.
“언니는 한국말이 유창한데 우린 아직 서툴러.”
“그게 뭔 소리여? 한국말이 유창하다니?”
“언니 말이 소박하고 재밌다는 뜻이지.”
“그건 그렇다 치고, 방금 우리라고 혔는디, 우리의 뜻이 뭐여?”
“동생과 나....”
“그럼 내 동생하고 한통속이 되겠다 그 말여?”
혜연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러구 내가 한 살 더 먹었대서 언니가 뭐여? 그냥 복례라고 불러.”
“언니라고 불러야 동생과 대등하게 어울리지. 내가 교복을 입고 온 것도 깊은 뜻이 있어.”
“깊은 뜻? 동생과 같은 또래 학생으로 보일려구?”
누나의 말에 혜연은 또 미소만 지었다.
“그 정도로 맘이 동혔으면, 시장님을 사둔어른이라고 불러야겠네?”
혜연은 계속 웃기만 했다.
“농담여.”
“농담이지만 언니 말이 너무 재밌어. 그래서 계속 언니라고 부를 거야.”
혜연의 말에 감동한 누나는 가슴이 떨렸다. 사실 혜연에게서 언니 소리를 듣는 게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포함하여 동네 친구들은 모두가 농투성이의 딸인데다 민주 말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최고 학력이었다. 하지만 혜연은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데다 대도시의 시장 딸이었다.
“고마워.”
누나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 엄숙 속에서 피어난 혜연의 해맑은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무슨 말로 혜연의 마음을 홀릴지 몰라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혜연을 감동시킬 멋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면 지금 당장 한강에 투신하겠어요.”
금방 방안은 폭탄이 떨어진 분위기였다. 누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했고, 혜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굴이 일그러진 누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혜연 같은 보석을 날렸다는 절망스런 낯빛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죠?”
혜연이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한테는 가장 편한 말이죠.”
“편하다고요?”
“미안합니다. 똑똑한 인간이 못 돼서.”
“미안하다뇨? 나도 바보여서 그 말이 좋은가 봐요.”
“뭐여? 이런 미친데기 말이 좋다구?”
누나의 얼굴에 금방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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