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4회)

충남시대 2023. 11. 28. 14:23

염라대왕과 저승혁신위원회


  “내겐 동생 말이 너무 맘에 들어.”
  “두 사람 모두 미쳤구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나면 환장하게 좋을 틴디 강에 빠져 죽다니, 도대체 그걸 말이라구 혀?”
  “누나, 일본에는 자살하는 여고생이 많아. 걔들은 모두 천재야. 허무가 뭔지를 아는 철학자들이라구.” 
  “그래라. 너도 천재니까 일찍 뒈져라. 쯔쯔쯔, 동생하나 있다는 게 저 꼴이니 싹수가 노랗구먼. 어이구 내 팔자야!”
  누나의 말 속에는 허풍이 묻어 있었다. 그 허풍은 혜연이 동생의 말에 동감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랄까, 혜연이 동생의 말을 곱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자 누나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연에게 누나가 엄살을 떨었다. 
  “나는 맥이 빠져서 꼼짝 못한 게 니가 바래다줘.” 
  그 말은 혜연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누나의 술책이었다. 나는 혜연과 함께 밖으로 나가 월명산 쪽으로 걸어갔다.
  “곧 입학식에 참석해야죠?”
  월명산 능선에 이르자 혜연이 먼저 작별인사를 꺼냈다. 나는 여름방학 때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혜연의 확답이 내 가슴을 휘저었다. 
  “집 앞까지 바래다드리죠.”
  “괜찮아요. 그만 돌아가세요. 오늘 재밌는 시간을 보냈어요. 누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세요. 너무 착한 분에요.” 
  “누나를 이해해줘요. 고생하며 살다보니 욕심이 많아요.”  
  “욕심이 아니라 꿈이 큰 거죠.” 
  나와 작별한 혜연은 바삐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혼자 월명산 자락을 걸어가는 혜연의 뒷모습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 환상이 모퉁이로 사라져서야 나는 발길을 돌렸고, 비로소 민주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나 가슴 조이며 나를 기다릴까. 누나 몰래 아래뜸 쪽으로 걸어갔다. 민주를 호숫가로 불러낼 참이었다. 혜연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민주와의 포옹으로 눙치고 싶었다. 집 근처에 이르자 언제 내 모습을 봤는지 민주가 반색하며 달려나왔다.
  “어제 왔다는 소문 들었어.”
  민주는 혜연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다. 혜연이 새뜸에 온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내가 혜연을 먼저 만났으니 그 상심이 오죽하겠는가. 
  “누나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혜연이 말은 꺼내지 마. 그럼 밤에 거기서 만나.”
  거기란 뒷산 자락에 있는 묘역을 지칭했다. 누나가 물색해준 그 은밀한 잔디밭은 동생이 민주와 밀회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

  내 일대기에서 9년간의 경찰 체험, 12년간의 요식업 체험, 5년간의 정치활동 체험, 11년간의 대학교 교수 체험, 25년간의 아카데미 문학강의 체험, 20여 년간 운영해온 잔아박물관 체험, 100여개 나라를 답사하며 연재한 ‘세계문학관기행’ 체험은 소설창작의 중심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동해안 항구와 포구에서의 임검소장 체험과 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 죄수 관리 체험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추동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겪은 체험이 대표작의 주제와 소재에 작용했던 것이다. 

 
1957. 4. 4

  아버지 생신이다. 음식을 장만하고 타동네 어른들까지 초대했다. 이동순 초등학교 은사님과 많은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잔아는 성공한다.” 밤에는 청년들이 한 방을 채웠다. 거기서도 내 칭찬이 자자했다.


1957. 4. 5

  한산에서 새벽 버스를 타려는데 집에서 뒤따라오신 아버지가 서울에 감기가 유행한다며 걱정하셨다. 그 한마디를 하시려고 30리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뿐 아니라 남한테도 인자하신 분이었다. 이가 득실거리는 동네거지를 방으로 불러들여 겸상으로 대접할 정도였다. 
  다음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성품을 추억담에 섞어 묘사한 작품「염라대왕과 저승혁신위원회」인데 여기에서 을돈의 말은 사실이다. 
 
  저승종합청사에서 혁신위원회가 열렸다. 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윤리분과회장과 징계분과회장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지옥분과회장과 천당분과회장이, 그리고 염라대왕 맞은편 좌석에는 이승죄업심사원 원장이 앉았다. 원장 뒤편에는 잔아를 비롯하여 저승사자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먼저 회의실 상단에 서 있던 사무총장이 개회선언을 하자 염라대왕의 모두발언이 이어졌다.
  “바야흐로 수십만 년의 세월이 여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승에서 말하는 속칭 21세기를 맞이하고 보니 과학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터넷이라고 하는 괴물이 이승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때문에 이승은 언어가 뒤틀리고 편의주의가 만연하여 도덕률이 무너지고 있다. 더구나 인터넷이라고 하는 괴물이 인간의 순연한 정신세계를 무도하게 오염시켜 야비(野卑)가 판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인간의 효심을 어떤 저울로 달아봐야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저기에 앉아 있는 잔아와 진솔한 대화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공식적인 회의장에서는 잔아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기 바란다. 저승세계는 이승세계보다 위상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염라대왕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곧장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윤리분과회장이 나섰다.
  “잔아는 듣거라. 너는 어찌하여 지옥행을 면했는고?”
  잔아가 대답을 못하고 눈치만 살피자 지옥분과회장이 그에 대해서는 대왕님의 말씀이 별도로 계실 거라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징계분과회장이 나섰다.
  “잔아는 듣거라. 너는 어찌하여 자식들의 상주 노릇을 막았는고?” 
  “예, 사실대로 고하겠습니다. 제 자식놈들은 철든 후로도 분노만 유발시켜왔습니다. 그놈들은 아름다운 삶이 뭔지를 모릅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은 고통을 체질화시킨 삶인데 제 자식놈들은 고통을 피해왔습니다. 그놈들은 막연히 행복을 추구만 했지 행복이 뭔지조차 모릅니다.”
  “그럼 자네는 행복을 뭐라고 여기는가?”
  “외람되오나 소생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행복은 저를 타락시키고. 제 순결을 오염시키고, 저를 야비하게 만들고, 저를 매끈한 형식주의에 물들게 하고,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허무를 희석시킨다고 말입니다.”
  “자식들에게 너무 큰 걸 노린 게 아닐까? 오늘날 그 정도로 의식과 지성을 갖춘 자식이 전체인구의 몇 프로나 되겠는가?”
  “제 자식놈들은 부모의 혜택만 노리는 빨대족이었습니다. 게으르고 속물적인 인간들입니다.”
  “괘씸한 놈들이군. 하지만 부모로서의 책임도 있는 법이니 그런 불효를 곱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회장님, 제 자식들은 애비가 아끼는 물건을 때려부수고, 부모가 땀 흘리며 일할 때도 놀러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에미애비가 병마에 시달리면 집 밖으로 던져버릴 놈들입니다.”
  “내 말은 빨대족을 불효자로만 보지 말라는 뜻이다. 귀여운 장난감이랄까?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잖은가. 그나마 자식이 없으면 심심해서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
  “아닙니다. 그런놈들은 심심풀이감도 될 수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분노만 유발시킬 뿐입니다.
  “그처럼 철딱서니가 없는 자식이어서 귀여운 장난감이라고 말한 거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은 옛날 같은 효자 찾기가 하늘서 별 따기다. 저승에서도 편의주의에 물든 이승의 빨대족을 어떤 저울로 심판할지 고민이 크다. 그러니 부모인 네가 변할 수밖에 없다.”
  “회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고생한 자식의 효심은 깊지만 노동을 모르는 자식은 효심 자체를 모릅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그나마 네 자식들은 효심이 엿보였다. 애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는 에미의 호통에 반발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 것만 해도 효자 측에 낄 수 있다. 네게는 부족한 자식들이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불효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때였다. 염라대왕의 엄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긴장시켰다. 분과회장들과 심사원장, 그리고 저승사자들은 모두 자세를 바로 세웠다. 잔아는 그동안 소탈하게 지내온 염라대왕의 엄숙한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다. 
  “잔아는 듣거라. 솔직히 말해서 너는 네 자식들보다 더한 불효자였다. 너는 부모 속을 지독히 썩인 놈이다. 너를 벌써 지옥에 보냈어야 옳았지만 을돈이의 부탁을 이행하려고 봐준 거다.”
  잔아는 을돈이란 말에 몸이 떨렸다. 마음 속 깊이 잠겨 있던 앳된 추억이 회오리를 일으켰다.

  옛날 잔아의 고향 마을에는 다리를 저는 홀아비 거지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애들까지도 50대인 그를 을돈이라고 불렀다. 마을에 잔칫집이나 초상집이 생기면 심부름 따위로 끼니를 때웠는데 경조사가 없을 때는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밥을 구걸했다. 을돈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사립문 밖에서 얼쩡거리면 아낙들은 동냥바가지에 찬밥 한 덩이를 담아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을돈이를 방으로 불러들여 겸상으로 대접했다. 잔아가 초등학생 시절인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방에서 아버지와 겸상으로 밥을 먹던 을돈이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어르신께서 생전에 못 받으신 복은 자손이 받을 거구먼유.”
  잠시 옛 추억을 더듬던 잔아는 울컥 치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인고?”
  “대왕님! 저는 제 자식들의 효도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불효자로 키웠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앉아계신 방바닥에 부엌칼을 꽂은 놈입니다. 제발 저를 지옥으로 던져주십시오!”
  “왜 그런 불효를 저질렀는고?”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