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회)

충남시대 2023. 11. 7. 11:35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생을 사셨다죠? 
  인터뷰할 때마다 신문기자나 아나운서의 첫마디는 대개 그러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이 아무리 기구해도 오이디푸스의 신탁(神託)만큼 끔찍한 팔자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아야 하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비하면 내 운명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삼년 전이었다. 67년간 써온 일기를 정리하다가 고교시절에 쓴 일기 한토막이 소름을 끼치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면 지금 당장 한강에 투신하겠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기였다. 겨우 고등학교 1학년생이 그따위 생각을 하다니! 그럼 나에게도 이미 가혹한 신탁이 내려진 게 아닐까? 행복을 부정한 그 가치전복(價値顚覆)이 내 신탁이란 말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운명을 타고 났기에 누구나 추구하는 행복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울고 싶어서? 그렇다. 나는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세상 아무것도 나를 실컷 울리지 못했다. 성장기의 참담한 가난, 자살충동, 비참한 노동, 늦깎이 대학생, 늦깎이 작가, 그래서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한(恨), 그런 것들은 결코 나를 제대로 울리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나를 실컷 울릴 수 있을까? 

  충청도 두뫼산골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찍 객지로 도망치는 바람에 성장기의 추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외아들인 내가 부모의 묵인 하에 집을 나간 것은 초등학교 졸업 후 2년이 지나서였다. 서울구경이 어려운 시대에 어떻게 생소한 부산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대전역에서 열차에 무임승차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차장한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초량역(옛 철도역)에 내릴 수 있었는지, 어떻게 구내매점에서 김밥과 어묵을 얻어먹었는지. 어떻게 일류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지, 어떻게 공군 일등병이 참모총장(김구 선생 아들)을 찾아가 의가사제대를 애소할 수 있었는지, 왜 부산 태종대에 올라 바다에 투신하려 했는지, 왜 자살을 포기하고 경찰공무원이 되었는지, 왜 살인범을 압송하다 수갑을 풀어주었는지, 왜 체포된 무장공비를 자수로 옹호해주었는지, 왜 일찍 공직을 사표내고 밑바닥생활을 택했는지, 어떻게 일용직 노동자가 4년 만에 벼락부자가 되었는지, 어떻게 첫 소설집으로 ‘1993년은 잔아의 해’ 라는 평을 받았는지. 어떤 특이한 문체로 한국문단을 뒤흔들었는지, 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친 탓에 치솟던 인기가 잠잠해졌는지, 왜 이름을 본명 김용만(金容滿)에서 잔아(殘兒)로 바꾸었는지, 왜 양평 문호리에 ‘잔아박물관’을 세웠는지, 왜 중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써오고 있는지, 왜 황량한 우주 생각에 매달려 살아왔는지....
  “은하수까지 명주실로 재면 몇 타래나 된다니?” 
  그런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난 바람에 나는 우주에 빠져들었고, 그 무하유(無何有) 세계에서 허무의 가치를 캘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생은 90%가 허무다. 하지만 그 허무가 생의 에너지로 작용했기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슬픔을 욕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슬플 때가 가장 행복하다. 

  
 1957. 1. 1

  자정이 되자 새해의 종이 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부산의 하늘은 구름에 가려 있지만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은 겨울답지 않게 훈훈하다. 아침 10시경에 학교에서 신년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어떻게든 한국의 4대공립(四大公立)인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에 들어가야 한다. 
  
  오늘 관영요금이 올랐다. 서울 부산간 3등석 기차요금이 3280환으로 오르고, 연탄 1개가 70환, 신문구독료는 月 400환으로 올랐다. 
  부산수용소에서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부 17명이 탈주했다. 일본에서는 평화선을 이승만라인(Lee Line)이라고 부른다. 
  조흥은행 종로지점에서 백주에 권총강도사건이 터졌다. 


1957. 1. 5

  고향 누나한테서 우편물이 왔다. 잃어버린 1957년도 일기였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한 해가 1957년도이니 첫 해분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되찾은 그 일기에도 송민주와 얽힌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무척 반가웠다. 

  다음은 내 절친인 김문호와 조성구가 55년 전인 그 당시를 회상하며 나눈 대화 내용이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문호 장군은 정치에 관여하다가 지금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문학박사인 조성구 교수는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만약 잔아와 민주의 관계가 들통났다면 잔아네 집안과 민주네 집안은 쑥대밭이 됐을 거라구.”
  중학2학년생이 누나 친구와 몸을 섞었으니 그 사실이 들통날 경우 두 집안이 난처했을 거라는 김문호의 말이었다. 그러자 조성구는 이런 말로 잔아를 옹호했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민주가 하필 친구 동생을 꼬시다니. 암튼 잔아 팔자는 재밌어.” 
  “평범한 짓이 아닌데 재밌다구?”
  “평범한 짓이 아니니까 재밌다는 거지.”
  “그럼 중학생이 누나 친구의 알몸을 껴안은 게 비범한 짓이냐?”
  “비범과 평범하지 않은 건 달라. 비범은 영웅이나 위인이 될 만한 기개를 말하는 거구, 평범하지 않다는 건 겨드랑이 털이 남보다 무성했다는 거야. 너도 봤지? 잔아가 중학생일 때 겨드랑이 털이 유독 쌔까만 것.”
  “그게 잔아 탓이 아니잖아. 민주가 사타구니를 보여준 게 잘못이지.”
  “일부러 보여준 게 아니고, 잠결에 허벅지를 잔아 목에 걸쳤을 뿐이라구.”
  “이유야 어떻든 조숙해서 털이 까맸을 텐데, 조숙(早熟)이야 말로 진리를 깨닫는 관문이지.”
  “진리를 깨닫는 관문? 이 사람 미쳤군.”
  “잔아의 조숙은 수업(授業)을 통한 학습이 아니라 사유(思惟)를 통한 학습이라는 말이야. 그 바람에 잔아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거구.”
  “사유?”
  “여자 속살을 일찍 익혔다는 건 그만큼 생각이 깊었다는 뜻이지.”
  “역시 미친놈 학설이구나.”
  “내 말은 타고난 재능을 조숙이 폭발시켰다는 뜻이야. 지적(知的)인 조숙이든 성적(性的)인 조숙이든 일찌감치 발랑 까진 애들은 세상을 보는 눈도 일찍 발랑 까졌거든. 문학공부가 세상살이에 유익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남보다 일찍 발랑 까진 거라고 볼 수 있어. 안 그래?”
  “옛날 어른들이 누구를 발랑 까졌다고 흉 본 것도 결국은 칭찬이었다, 그거야?”
  “맞아. 발랑 까진 건 일종의 선험(先驗)이라고 볼 수 있지. 선생님도 먼저선(先)자와 날생(生)자를 쓰잖아. 먼저 태어난 사람, 즉 세상사를 먼저 체득한 사람.” 
  “그러니까 잔아가 우리보다 이지(理智) 발달이 앞질렀다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우리도 더 늙기 전에 여자 사타구니만 탐구하다 생을 마감하자구. 그보다 더 거룩한 생이 어딨겠어.”
  “어쭈, 유머가 제법인데? 너도 문학적인 유전자를 타고난 놈야. 네가 사관학교에 안 들어가고 소설을 썼다면 세계적인 작가가 됐을 거라구. 역시 우리 셋은 통하는 게 있어.”
  초등학교시절 삼총사로 불린 잔아, 문호, 성구는 각각 다른 이웃동네에 살면서도 함께 어울리곤 했다. 그들은 참외서리나 오이서리로 말썽을 피웠고, 수업시간에는 손톱으로 이를 잡아 싸움을 시키다가 담임선생한테 혼나곤 했다. 하지만 석차순이 1,2,3 등인 우등생들이어서 불량배로 몰리진 않았다. 


1957. 1. 7

  우리 고향마을 새뜸에는 김씨, 오씨, 송씨, 서씨 권씨, 정씨, 구씨 등 각성바지 일곱 가구가 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집집마다에는 누나 또래의 처녀들이 끼어있었다. 그녀들은 밤마다 우리 집에 모여 모시길쌈이나 윷놀이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 무렵에는 모두 제자리에 누워 잤다. 그래서 누나와 한 방을 쓰던 어린 나도 함께 끼어 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곱 살 때인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잠을 자는 중에 숨이 막혀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통통한 허벅지가 내 목을 누르고 있었다. 곁에 자던 아랫집 민주가 잠결에 허벅지를 걸친 모양이었다. 나는 민주의 다리를 치우려고 조심조심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달빛에 비친 하얀 허벅지 사이로 아슬아슬한 미궁이 보였다. 그 후로 민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민주는 부잣집 외동딸로 누나 친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나보다는 두 살 위였다. 
  나는 초등학생이 되자 민주를 껴안고 자는 공상에 빠지곤 했다. 그러다보니 고추를 쥐고 자는 게 버릇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민주는 5학년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예쁜 민주를 마을 사람들은 ‘달꽃’이라고 불렀다.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민주의 마음을 사려고 엉뚱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기러기가 되고 싶었다. 민주를 등에 태우고 하늘을 떠다니면 민주는 내 몸을 꼭 껴안을 수밖에 없고, 학교에 다닐 때도 그런 식으로 날아다니다보면 나한테 반해버린다는 공상이었다.  
  그 후 민주의 얼굴은 중학생이 되자 더욱 예뻐져 영화에 나오는 춘향의 얼굴을 빼다박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누구는 삼국사기를 들먹이며 백제 개루왕이 욕심냈다는 도미부인의 화신이라고 아는 체를 했다. 나는 민주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어서 중학생이 되어 민주와 어울리고 싶었다. 하지만 민주는 나를 멀리했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고, 학교를 오갈 때도 일부러 나를 피했다. 어느 날 나와 마주친 민주는 이런 말을 했다.
  “넌 얼굴값은 할 거야. 네 수준에 맞는 애하고 까불겠지만.”
  나는 점점 더 오금이 저렸고, 애가 탈수록 내 공상은 더욱 황당해졌다. 요즘으로 치자면 핸드폰이랄까, 손에 무슨 첨단 제품을 들고다니며 뽐내고 싶었다. 핸드폰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시대라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지닐 수 없는 물건이었다. 상상해보라! 지구상에서 나 혼자만 핸드폰을 지녔다면 나와 통화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민주의 콧대가 높다한들 나를 따르지 않고 배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