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구멍을 모두 때워봐. 그리고 보트 위에다 장정 다섯 명 무게만큼 모래 가마니를 실어서 집중사격한 장소에 띄워봐.”
작업을 끝내자 서장이 또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방파제로 사수들을 보내 어젯밤 사격했던 위치에서 다시 총을 쏘도록 해봐.”
일제히 보트에 대고 사격했다. 총알을 맞은 보트는 뱅그르 돌다가 모로 기울면서 모래 가마니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됐어!”
지휘관은 환호성을 질렀다. 즉시 주문진 관내에 있는 데구릿배(저인망어선)들과 데구리들이 전부 동원되었다. 잠수복을 입은 데구리들이 공기 호수를 투구에 매달고 물속으로 잠수하자 데구릿배마다에서는 펌프질이 요란했다. 쉴 틈 없이 펌프질을 해야 데구리가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데 작업하는 어부들의 사기를 돋아주기 위해 막걸리 통이 배달되었다.
“작전을 잘 할라모 술도 무기라카이.”
“하머, 술이 총보다 낫지러.”
“아이다. 대포보담도 더 쎈 게 술인 기라.”
긴장이 풀리는 듯싶자 여기저기서 농담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부두에 백절치 듯 모인 인파 중에서 나이 든 아낙 하나가 데구릿배에 손짓을 하며 덜퍽진 한마디를 쏟아냈다.
“저기 뽐뿌질 하는 주정뱅이가 우리 영감탱인기라. 참말로 작전 잘하제?”
아낙의 그 말을 동호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대다수 어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실 어민들은 공비 침투니 토벌작전이니 하는 시국사건보다 어획이 당장 문제였다. 사건을 싫어하는 것도 국가적인 방위개념보다 고기를 잡는데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피뜩하면 출항금지다 출항통제다 하고 배를 묶어둬야 하고 그게 아니면 배를 모래톱으로 올려놔라, 배를 선단으로 묶어 출항시켜라, 따위의 귀찮은 품을 사주기 때문이었다. 어민들한테는 정말 지겨운 지시였다. 그 화를 은근히 농담으로 풀어냈던 것이다.
한나절이 지나자 드디어 시체를 건져내기 시작했다. 다섯 구였다. 벌써 시체마다에는 골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에메, 골뱅이 팔아먹긴 영 글렀지러.”
어부가 공비의 시체를 건져냈다는 데에 자부심이 느껴진 어민들은 그런 말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록 어패류 판매에 지장을 초래한다 해도 그깟 손해 정도로 애국심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그런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
구평이 유치장 간수로 발령이 난 후로는 두 사람의 만남이 더욱 빈번해졌다. 범죄심리를 연구한답시고 간수 근무를 지망한 구평은 술 생각이 날 때마다 동호를 다방이나 술집으로 불러내곤 했다. 그 당시에는 다방에서 위스키를 팔고 있어 가벼운 한두 잔 술은 다방에서 마시게 마련이었다. 특히 겨울에 톱밥을 태우는 난로 옆에서 매캐한 연기 내를 맡으며 위티 잔을 기울이는 재미는 일종의 멋이 되기도 했다. 한창 유행 중이던 위티는 위스키에다 커피를 탄 술인데 찻값보다 훨씬 비싼 술이어서 마담이나 레지는 손님이 들어오면 한 잔이라도 더 팔고 싶어 손님 곁에 바짝 붙어앉아서 향숫내를 풍기곤 했다.
구평이 간수 근무를 시작한 지 일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그날도 퇴근길에 만난 동호와 구평은 다방에 들어가 위티부터 주문했다. 자정 무렵까지 위티 대여섯 잔씩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다방 문이 닫힐 무렵에야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조용했다. 곧 통금 사이렌이 울릴 테니 모두 서둘러 집에 돌아간 모양이었다. 동호는 구평의 청에 못 이겨 역전 골목에 들렀다. 구평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꼭 이차를 들러야 직성이 풀렸다.
술집마다 커튼이 쳐져 있어 골목이 어둑신했다. 하지만 보나마나 방안에는 술판이 벌어져 있을 것이었다. 그런 업태(業態) 위반을 단속해야 될 경찰관 신분으로서 단속 대상 골목을 걷기가 민망해도 가끔 찾아가던 발길이었다. 동호는 단골집 문을 노크했다. 커튼이 열리고 마담 얼굴이 삐죽 내비쳤다.
“얼래, 통금인디 웬 일여?”
홍마담이 반색을 하며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다른 처갓집이 생겨서 안 오나 혔는디..... 그려두 아즉 의리가 살어 있구먼?”
“오랜만에 장모님이 보고 싶어서.”
구평이 능청을 떨었다.
“속은 뻔하지 뭐.”
“그럼 어서 딸이나 내놔.”
술상을 준비하는 홍마담에게 구평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아따 성미도 급하긴. 순사 눈을 피해서 올라면 시간이 숼찮이 걸릴 틴디.”
벌써 단골손님을 데리고 여관에 간 모양인데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말이었다.
“꿩 대신 닭이지 뭐.”
동호가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빨라도 네시 통금시간이 끝나야 돌아올 텐데 공연히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같은 형산디두 입맛이 이러큼 다르댜? 하나는 햇것을 좋아허구 하나는 묵은 걸 좋아허구? 그려서 내가 강 형사를 더 좋아헌당게.”
그녀는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이 푸짐해보였다. 이곳 술집 골목은 좀 후진 편이지만 그녀의 웃음만큼이나 소박해서 좋았다. 술값과 화대 역시 무척 쌌다. 아가씨들도 영악스럽지 않고 태도가 투박하고 인심도 풋풋했다. 홍마담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겨우 반년이 지났지만 벌써 터주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오지랖이 넓은 여자였다.
“그나저나 충청도 사람이 왜 멀고먼 강릉까지 스며들었소?”
동호가 모처럼 홍마담에게 농을 걸었다.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했지만 그녀에게서 양반 소리를 들어온 동호였다.
“왜냐구? 그게 궁금헌 거여?”
“궁금하니까 물었지.”
“다름이 아니라 내 그것은 말여, 항아리 만혀서 멍청도 사내만으론 다 채울 수 읎당게. 인자 강원도 뱃놈 걸 다 빨아먹으믄 서울로 가서 진짜 한번 붙어볼 참잉게.”
“뭘 붙어?”
“서울 놈들 중에서도 나처럼 헤벌렁헌 물건을 좋아허는 놈이 많단 말여. 인재사 마흔하난디 아즉은 쓸만 허구먼.”
“그동안 너무 무리했잖아? 이젠 기계를 쉬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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