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4회)

충남시대 2023. 8. 1. 14:43
낯선 세계

 

 

  “이제 다시 장가를 들어야지. 더 늙기 전에.”
  “장가? 기거이 머가 중하네? 길코 내레 장가들 처지갔어? 인자 머가 신나는 인생이라고 계집 얻어 살간. 거더 괴롭게 살다가니 팍 거꾸러지는 거이 젤루 빛나는 거디.”      

  “빛나다니?” 
  “기거이 사는 의미 아니겐?” 
  “미친 사람.....”
  “기럼, 미쳤디. 미치구말구디. 미친 거이 얼마나 멋지누.”
  배승태가 깔깔깔 웃음을 날렸다. 
  “자 받아.”
  동호가 술잔을 내밀자 배승태가 얼굴을 돌린 채 팔만 뻗었다. 잔을 채워주자 후딱 비우고 다시 팔을 뻗었다. 
  “제깍 잔을 채워주라마,”
  그 오기가 애처러웠다. 동호는 한 손으로 그의 술잔 들린 손을 감싸쥐고 한 손으로 술을 채웠다.  
  “강 형사는 행복하네? 출세했디? 얼굴이 부하군 기래.”
  배승태가 술잔을 비우고 또 따라달라며 팔을 뻗었다. 그 빈 잔을 동호가 낚아챘다.
  “보고 싶겠군.”
  “누굴? 연주년 말이네?”
  “그분과 얼마 동안 함께 지냈지?”
  “꿈이디. 내레 육 년 간 꿈을 꾼 게야.”
  “그토록 사랑했나?”
  “사랑? 머가 얼어죽을 사랑이네. 서로 미쳤을 뿐이래두.”
  배승태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동호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배승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무슨 말로 저 영혼을 위로해줄까?
  “지금 날 동정하는 게가? 절대 날 동정하디 말라우. 내레 아직두 통일전사야. 알간? 제꺽 네 목을 찌를 수 있어. 알간?”
  “떠들지 말고 술이나 따라!”
  동호가 술잔을 내밀며 소리쳤다. 배승태가 술을 채워주자 동호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말고 멍하니 잔속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술이 연주의 눈물처럼 보여 그 맑디맑은 액체로 온 몸을 적시고 싶었다. 그런 용기를 부려보고 싶었다. 용기, 그렇다. 그런 만용으로라도 동호는 자기의 죄업을 용서받고 싶었다.
  “와 울상이네?”
  배승태가 소리쳤다.
  “머가 슬픈 게가? 늬 같은 간나새끼가 슬픔이 먼딜 알간? 배때기에 기름살 쪄개디구 슬픔이 먼딜 알갔어? 게우 낭만을 개디구서리 슬픔?”
  “낭만이 아니라 사연일세.”
  “사연? 늬깟 거이 먼 사연이 있네?”
  “나한테도 슬픈 사연이 있잖겠나?”
  “배부른 소리 말라우. 늬깟것들은 슬픔이 먼디를 몰라.”
  배승태가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동호의 가슴을 찔렀다. 사실 연주에 대한 죄책감 역시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한 수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동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따리를 끌어안고 걸어오는 연주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그녀의 발자취를 추정해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970년에 처음 집을 나간 후로 지금까지 행방불명이 된 셈이었다. 영월댁의 말대로 연주가 8년 전에 여기에 왔다면 서울에서 자기를 찾아다닌 일 년을 빼고도 이십 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단 말인가! 가여운 것! 동호는 연주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

 

  연주의 병세가 좋아질 무렵 동호는 서초경찰서에 근무하는 후배 조구평 경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두문과 황억배의 거처를 알고 싶어서였다. 이튿날 아침 조 경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찾기는 찾았지만 무척 힘들었노라고 엄살을 떨었다.
  “다음부턴 쉬운 일을 부탁하세요.”
  “쉬운 일이면 왜 경찰에 부탁해. 암튼 수고했네.” 
  “송두문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고요 황억배는 공주 근처에 살고 있답니다.”
  “두 사람 직업은?”
  “현주소만 알아봐달라고 하셨잖아요?”
  “형사가 왜 그리 둔해? 더 캐봐 남 주나? 나는 옛날에 선배가 한 가지를 물으면 열 가지를 대답했어. 요새 직원들한테 물들었나본데 요샛사람들은 단순해서 탈야.”
  “뻔한 말씀 마세요. 선배님 시절보다야 요새 직원들이 훨씬 똘똘하죠. 그 시절엔 모두 졸거나 더듬었잖아요?”
  “더듬다니?”
  “잘 안 보여서 더듬고, 더듬으라고 하니까 더듬고, 더듬기 좋아서 더듬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더듬었다고 하길래 나는 여자 사탱이를 먼저 생각했지. 암튼 자네 똑똑해졌네. 요즘 근무자들은 똑똑한 걸 좋아한다며?” 
  “무슨 말씀이죠?”
  “피장파장일세. 어려운 질문은 어렵게 받을 수밖에.”  
  “똑똑한 사회니까 똑똑해야죠.”
  조구평이 한마디를 불쑥 내밀었다.
  “그럼 나도 한마디 하지. 그땐 미련한 사회였으니까 미련했던 거구.”
  저쪽에서 껄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별난 후배, 명문대 철학과를 나온 조구평은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졸업과 동시에 경찰관이 되었는데 경찰생활 딱 오년만하고 석사와 박사과정을 시작한다더니 벌써 삼십년을 넘기고 있었다.
  동호는 조구평을 미스터 조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구평이라고 불렀다. 이름에 계급을 달아 부르고 싶지 않아 그냥 구평이라고 압축했던 것이다. 사회적인 간판이 없는 순수한 개체로 여겨야 그를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합기도 3단인 그는 원래 서울 기동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데모진압이 싫다며 시골 근무를 자청했던 인물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발령 나기가 별 따기보다 더 힘든 판국에, 더구나 기동대 근무를 마치면 서울의 일류 경찰서에 배치될 텐데 그걸 마다하고 좌천을 택했으며, 강원도에서도 춘천이나 원주를 마다하고 외딴 동해안 근무를 지원한, 그야말로 괴짜였다. 
  동호가 구평을 처음 만난 것은 강릉경찰서에서 근무할 때인 1970년대 후반으로 그때 조구평의 계급은 순경이었다. 그와는 나이와 계급을 떠나 친구처럼 지내온 사이로 그와 어울린 지 1년쯤 지난 어느 해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