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1회)

충남시대 2023. 7. 11. 09:56

윤희정 동무레 꽃처럼 별처럼 곱디오

   “배승태 동무! 기거이 먼 소립네까?”
  윤희정의 당돌한 말에 배승태의 몸이 움찔했다. 
  “기걸 말이라구 합네까? 동무를 영웅으로 키운 거는 위대하신 수령님 은혜가 아닙네까? 말을 조심하라요.”
  순간 배승태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오싹,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배승태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 목숨 바쳐 수령님을 옹위하갔습네다!” 
  “제꺽 마음을 다잡기오! 길코 우리 아들 딸두 수령님의 용맹한 전사로 억세게 키우기오.”
  윤희정은 큰 소리로 배승태를 거듭 닦달했다. 배승태의 눈에서 참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윤희정은 팔로 배승태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났다. 결혼식은 처음 만나고 삼 개월이 지나 치러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윤희정의 큰아버지 댁에서 결혼을 축하하는 피로연이 열렸다. 온 집안 식구와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장래를 축복해주었다. 
  “오날 반살기는 조카사위가 된 배승태 동지를 위해 리당비서 동지께서 특별히 차린 거외다.”
  윤희정 아버지가 먼저 서두를 꺼냈다.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술잔이 돌면서 분위기가 더욱 익어갔다. 여기저기서 신부에 대한 덕담이 오갔다. 한결같이 윤희정을 근동에서 가장 예쁜 미인이라고 칭송할 때마다 배승태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내는 없을 것만 같았다. 

 

  “기런데 자수하갔어?”
  배승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동호는 이제야 그 당시 배승태가 자수를 부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비밀스런 말도 거침없이 꺼냈었군? 신변에 위해가 됐을 텐데.”
  물론 동호한테만 비밀스런 말을 했고 동호는 그 비밀을 숨김으로써 그의 신의에 보답했지만 그때부터 동호는 배승태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배승태가 유치장에 입감 된 직후였다. 취침시간 무렵 동호가 감방으로 찾아갔을 때 배승태는 연필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북에 두고 온 처자식에게 쓴 편지라고 보여주며 히죽히죽 웃었다. 보낼 수 없는 소식인 줄 알면서 그냥 써봤을 그 편지에는 어이없게도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자랑스런 인민의 전사로서 당당히 싸우다 죽겠다!
  “술을 들디 않구 안죽 먼 생각을 하는 게가?”
  배승태가 동호의 표정을 살피며 술잔을 내밀었다. 동호가 잔을 받자 배승태는 술을 채우고 나서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기놈들은 지금 어데 사는디 모르갔어.”
  “그놈들이라니?”
  “뉘긴 뉘야 어부들 말이디.”
  동호는 그제야 송두문과 황억배를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배승태가 왜 새삼 그들을 생각하는 거지? 동호는 그게 궁금했다. 그리고 송두문과 황억배가 지금은 양심에 어떤 갈등을 느끼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동호 역시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아직도 검거 주장을 고집할까? 보상금을 어떻게 썼을까? 배승태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호는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왜 진작 그들과 만날 생각을 못했는지 후회스럽기도 했다.
  “기네들 이름이 머랬디?”
  “송두문, 황억배.”
  “기래 맞아.”
  “그런데 왜 갑자기 그들 생각이 났는가?”
  “재판 받을 때를 생각하니께니 기네들 생각이 떠오른 거라메.”
  “재판? 그건 왜?”
  “웃음이 터질 뻔했디. 내가 총을 쐈다고 우기던 놈, 그 종간나가 누구디?”
  “송두문.”
  “기놈 대단한 놈이었어. 보상금이 탐나개디구 기랬디?”  
  배승태가 껄껄껄 웃었다. 동호도 따라 웃었다. 동호의 입에서는 배승태보다 더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뱃살을 잡고 웃기까지 했다. 
  “와 기러네?”
  배승태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넨 몰라도 돼. 그럴 일이 있었어.”
  동호는 또 뱃살을 잡고 웃었다. 송두문과 황억배의 다투는 목소리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쟁쟁했던 것이다. 언도공판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사천지서에서 기다리던 경비전화가 걸려왔는데 종적을 감췄던 황억배가 움막으로 숨어들었다는 기별이었다. 동호는 급히 지프차를 몰았다. 황억배를 만나면 검거 주장에 대한 의심이 풀릴지 모를 일이었다. 
  송두문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중천을 넘는 중이었다. 동호는 포구 쪽에 차를 세워놓고 주변을 살피며 송두문네 쪽으로 다가갔다. 초가집 토방에는 흑고무신과 헌 운동화가 짝지어 놓여 있었다.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 동호는 발길을 멈추고 창호지 문짝 가까이로 귀를 세웠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섞여 이따금 쇠젓가락 소리가 들려왔다.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호는 귀를 문 쪽으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황억배의 쉬어터진 목소리가 발끈했다.
  “이놈 보게. 그걸 말이라구 혀? 날 내쫓은 늬놈 속을 모를 줄 알구?”
  “늬놈이 숨어야 일이 잘 풀릴 팅게 꺼지라고 헝 건디 워쩌자구 악써 이놈아! 늬놈허구 같이 지내면 일이 꼬이기 십상 아녀?”
  송두문도 목소리를 높였다.
  “뭐시 워쪄? 실인즉슨, 보상금 타서 혼자 팔자 고칠려구 수작을 부리구선 뭐시 워쪄?”
  “보상금 좋아허네. 늬놈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서 다 글러먹었는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보상금여.”
  “입조심 안 헝 게 뭐가 있냐? 이놈아. 모다 늬놈 시키는 대로 혔잖여? 공비 팔목쟁이를 비틀었다고 혀라 허걸레 그러큼 말을 꾸며대기두 허구, 먼 디루 도망치라구 허걸레 충청도까정 가서 숨기두 허구. 그런디두 이러큼 날 박대혀? 쌍놈!”
  “육갑떨지 마! 늬놈이 시건방지게 실인즉슨 허구 나서는 통에 다 눈치챘다는 거여. 혀서 자수로 처리허게 됐다는 거여 이놈아.”
  “이놈 또 사람 잡네. 재판정이서두 늬놈이 밥 보재기 말을 꺼내는 바람에 상금은 받은 거나 진배없다는디 또 벌겋게 속이는 것 좀 봐.”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