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이? 내가 총잡이었다 기거네?
“와 야속한 팔자가 멋진교?”
“기거는 사람을 긴장시키디. 긴장시키니께니 싱싱한 게구.”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심더.”
어느새 강식은 아버지의 말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늬도 알디? 흐르는 물은 싱싱하고 괸 물은 썩잖네?”
“.....”
“썩은 물에서 고기가 살 수 있간? 살 수 없디?”
“네.”
“인간도 고기처럼 생물이니께니 탁한 데서는 병들디?”
“네.”
“병들지 않으려믄 긴장하며 살아야갔디?”
“그라요.”
“예수님이나 석가모님도 탁한 걸 싫어하셨디? 기러니께니 긴장하며 사신 분들이디? 긴장하며 사신 분들이니께니 늬처럼 야속한 운명을 타고난 분들이디? 내 말을 이해하겠네? 어드래서 늬가 위대한디 인자 알간?”
“.....”
“날래 대답해보라우. 긴장이 머겐?
“아부진 말을 와 어렵게 설명하시능교.”
“긴장은 멀 창조하려는 에너지가 되는 거라메. 기럼 멀 창조한다는 거디?”
“.....”
“멀 창조할 건디 기걸 찾아야 돼. 위대한 늬가 말이디. 알간?”
“그게 먼데예?”
“나도 잘 모르디. 기러니께니 늬가 창조해야잖갔어?”
“아부지.”
“말 하라마.”
“아부지는 긴장하고 싶어 총을 좋아하셨능교?”
“머이? 내가 총잡이었다 기거네? 기래서 무식하다 기런 말이네?”
“무식하단 게 아니고, 예수님이나 석가모님을 말씀하시니까.....”
“총잡이도 나름이디. 진정한 총잡이는 고통이 먼디를 깨달은 사람인 게야. 고통이 먼디를 설명하면 늬가 알아듣기 힘들 테니께니 대학생이 되믄 얘기해주갔어.”
“한가지만 더 묻겠심더.”
“말 하라마.”
“어무이를 사랑하십니꺼?”
“애정은 별로디만..... 동정심은 들디. 늬 오마니는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메. 텅 빈 머릴 개디구 바쁘게만 살고 있디. 출세가 먼디도 모르면서 허세만 부리는 사람인 게야. 행복이 먼지두 모르면서 행복을 찾겠다고 날뛰는 사람. 내가 늬 오마니를 동정하는 이유가 기거라메.”
“그러니까네 어무이 같은 분이 빨갱이가 뭔지 모르는 인간형인교?”
“기러티. 늬 오마니는 빨갱이가 먼디 모르기 따외 남편이 어떤 인간인디 모르는 거라메. 기러니께니 천방지축으로 사는 게구. 기런 여자한테서 어캐 진정한 애정이 생기갔네. 기래서 내래 늬 오마니를 동정하는 거라메. 따지고보믄 기거이 더 큰 애정이갔디.”
“동정심이 더 큰 애정이라뇨?”
“집단을 사랑하는 정신, 기거이 더 큰 애정 아니갔어? 기러티?”
배승태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새로 한 점을 쳤다. 아들 방을 나온 배승태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북쪽 가족 모습을 떠올렸지만 어쩐지 그 모습도 반갑지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북쪽 가족을 잊어본 적이 없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더욱 간절했는데, 배승태는 그런 심적 변화가 이상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희망이 사라진 걸까? 북쪽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꽃이요, 향기요, 아침햇살이며 그윽한 달빛이었다. 모든 아름다움과 순결과 보람은 북쪽 가족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북쪽 가족이 시시하게 느껴지다니. 왜 그럴까? 왜 이쪽이 불행하면 저쪽도 불행하게 여겨질까? 배승태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술맛도 잊은 채 취하고만 싶었다. 지금은 취할 뿐이고 이유는 나중에 따지고 싶었다.
괘종시계가 두 점을 쳤다. 지화는 오늘도 밤을 지새울 모양이었다. 배승태는 또 주방에서 술병을 챙겨왔다. 소주 한 병이 금방 비워졌다. 그때였다. 현관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지화의 풀어진 모습이 나타났다. 옷도 구겨지고 머리도 헝크러진 상태였다. 얼굴에는 술기운이 붉다 못해 검게 절어 있었다. 깊은 밤이라 유심히 바라볼 이웃이 없어 다행이었다. 하기야 항상 밤에만 돌아오니 그 추한 모습을 본 사람이 없겠지만 소문은 이미 퍼진 상태였다. 지화는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열나게 자기 입장을 변명했을 테고 그 결과 동네 여론을 지화 편으로 넉넉히 확보했으리라.
남편은 지금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우?
그러면 강식 엄마 꼴이 뭐가 되겠수.
착한 사람 악처 만들지 말라지 그랬수?
강식엄마 같은 사람이 바람이 났다면 그 이유가 뭐겠수?
북쪽 아내는 남쪽 아내보다 더 늙었을 거우. 옛날 아내가 아닐 거우.
텔레비에서 못 봤수? 장군님만 떠받드는 꼴을?
그런 여론은 모두 지화의 말만 듣고 판단한 충고일 터였다. 배승태는 혼자 벙긋 웃었다. 자기와 하등 관계없는 여론이었다. 누가 자기에게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해도 그 여론은 아무 상관없는 헛손질에 불과했다.
“또 술을 마신 게가?”
배승태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지화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에티켓이랄까, 그 말은 아내가 취해 돌아올 때마다 내뱉는 노래 후렴 같은 말이었다.
“보모 몰라서 묻노?”
지화가 당당한 목소리로 받았다.
“노래방인디 지랄인디를 다녀왔군 기래?”
“당신은 와 그런 델 싫다카노? 난 요즘 춤도 배우고 있데이. 지루박, 부르스, 도롯도, 탱고, 그 중에서도 탱고는 아주 몸을 뒤트는기라. 당신도 한번 나가보레이. 얼마나 멋있능고 나가보믄 알지러.”
“춤을 배운다는 게가?”
“돈을 벌었음 쓸 줄도 알아야제. 늙으모 암 소용 없는 기라.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도 모르나.”
“노세고 머고 기건 서양춤 아니네?”
“서양춤이모 어떻고 동양춤이모 어떻노.”
“서양춤을 나쁘단 기 아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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