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5회)

충남시대 2023. 5. 23. 16:40
가석방된 배승태 결혼하다

 

 

 서울경찰청에서 정보형사로 근무하던 동호는 학생데모 방지 소홀로 징계를 먹고 동해안으로 좌천당했는데 처음 근무지가 강릉경찰서였다. 동호는 아예 좌천을 당한 김에 죄수들과의 생활을 체험하고 싶어 모두가 기피하는 유치장근무를 자청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생활에서 죄수들과 어울렸잖은가. 그 후 동호는 일 년 동안의 유치장 근무를 마치고 진리포구 임검소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곳에서 아내 성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본서(本署)로 들어가 정보과 근무를 맡게 될 무렵 ‘울진·삼척사건’이 터지고 배승태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방이 차디?” 
  배승태가 손으로 방바닥을 짚어보며 말했다. 해가 지자 바닷바람에 노출된 창고방에는 을씨년스런 냉기가 흘렀다. 
  “보일러 온도를 높였으니께니 쫌만 기다리라메. 여갠 오월이래두 따순 온기가 정답디야.”   
  바닷가에서 돌아온 동호 역시 어서 방에 온기가 돌기를 바랐다. 저녁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상 위에는 생선회, 해물전, 매운탕, 삶은 문어 등이 올라 있고 술은 맥주와 소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독한 술을 마셔온 배승태로서는 동호의 취향을 배려해서 맥주를 추가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먹기엔 음식이 너무 많네.”
  동호가 낭비라고 말하자 배승태가 되레 핀잔을 주었다. 
  “왜서 기런 말을 하는 게가?” 
  “열 명이 먹고도 남을 음식이야. 안 그런가?”
  “정표디. 기러니께니 음식이 많고 적고가 문제겐? 자네가 좋으니깐 우래기회도 멕이고 싶구, 문어회도 멕이고 싶구, 매운탕도 멕이고 싶구, 해물전도 멕이고 싶구....”
  “고맙네.”
  “아까울 게 머갔어? 자넨 내가 살아가는 힘이 돼왔더랬어. 내 추억 속엔 꼭 자네가 끼어 있디. 기나더나 자넨 언제 경찰을 그만뒀네?”
  “자네가 사 년 징역형을 받고 이송된 후 강릉에서 십 년 더 근무하다가 서울로 떠났어. 서울경찰청에서 사 년 간 정보업무를 보다가 옷을 벗었지.”
  “정보업무란 거이 메가? 아직도 빨갱이 잡는 일이네?”
  동호는 뭐라고 답변할지가 고민스러웠다. 물론 반공업무가 핵심업무의 하나지만 정치사찰 따위나 반국가사범 색출업무 따위를 일일이 설명해줄 수가 없었다. 과연 반국가사범이란 게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보니 한마디로 이거다 하고 설명해주기가 난처했다. 동호가 정보업무에 대한 대답을 미루자 배승태는 사적인 일을 물었다.
  “왜서 그만둔 게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어. 만날 데모 현장에 출동해서 학생들과 부딪치거나 선거 따위에 개입하는 업무가 정서에 맞지 않았어. 그래서 무조건 사표를 내고 고생길을 자청했지.”
  “기래두 성공했잖습메?”
  “마침 건설 업체를 꾸민 대학 동창의 권유로 함께 일하다가 친구가 몸져눕는 바람에 사업체를 맡게 된 거야.”
  “자넨 착하구 똑똑하니께니....”  
  “그건 그렇고, 자넨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동호는 배승태의 표정을 살피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배승태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듬해 가석방돼개디구 누님을 따라갔디. 누님은 포항에서 큰 왜식집을 했더랬는데 거게서 장사일도 거들고 생선회 뜨는 기술도 배웠어.”
  배승태는 손바닥을 모로 세워 칼질하는 시늉까지 해보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용맹스런 전사가 회를 뜨고 지냈다는 그 희화적인 운명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한편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방법, 생선 껍질을 벗기는 요령, 재재칼질하는 각도 등을 실감나게 설명하는 걸로 보아 음식솜씨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회뿐 아니라메. 내레 매운탕 하난 끝내주디. 누나는 내 음식솜씨에 반했더랬어. 무장공비가 어드러케 음식솜씨를 익혔노? 하구서리 내를 껴안군 했디.”
  “부모님은 찾아뵈었는가?”
  “말이라구 하네? 봉분을 껴안구서리 통곡했어야. 하두 울어서 살이 빠졌더랬어. 날마다 찾아갔으니께니.”
  “효자군.”
  “효자가 뭐겐? 그런 말 입에 대디두 말라우.”
  “누나가 한을 푸셨겠군.”
  “누나가 아니구 오마니시디.”
  “그렇네. 어머니 같은 누님이지.” 
  “일 년쯤 지내니께니 장가부터 들라구 졸라대셨어. 업소를 따로 차려줄께니 장가들어개디구 부부가 함께 돈을 벌라는 기야. 내래 장가들 맘이 없다구 거절했디.”
  “거절 이유는 알겠네만, 왜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실토하지 않았는가?”
  “실토했디.”
  “그런데도 결혼하라고 조르셔?”
  “뻔하디. 생전 만날 수 없다는 기야. 통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께니 북한 식구는 식구가 아니란 거디.”
  그러니 어서 가정을 꾸려야 집안꼴이 된다며 누나는 자꾸 성화를 부렸다. 마침 누나가 아끼는 젊은 종업원 아가씨가 있었는데 누나는 그녀를 업소 지배인 격으로 점찍어 둔 상태였다. 누나는 이런 말로 동생을 설득했다.

  “지화는 책임자가 되고도 남을 여잔기라. 총명하제, 바지런하제, 맘씨 곱제, 인물 곱제, 하나도 빠지는 게 없는 복덩이지러. 늬가 운이 좋아 지화 같은 여잘 만난기라. 알제? 그뿐인 줄 아나. 나이가 늬하곤 열세 살 차인기라. 그보담 더 큰 횡재가 어딨겠노. 안 그렇노?”
  누나는 침이 마르도록 지화를 칭찬했다. 배승태 역시 지화의 미모와 성실성에 마음이 끌려온 터라 내심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 자체를 부정해온 배승태였다. 남쪽에서의 결혼은 죄를 짓는 짓이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그는 북한 아내를 생각할 때만이 세상이 밝게 보였다. 아내 윤희정은 배승태가 아름답고 희망찬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었다. 그 눈을 빌리지 않을 때 이 세상은 어둡고 답답할 뿐이었다. 때문에 윤희정이 없다면 그는 살 의미마저 상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