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나이는 날 빨갱이로 여긴 거라메
“머이?”
“아부지가 한번이나 우릴 식구로 생각했능교? 우리가 남이지 식군교? 아부지 식구는 북한에 있잖소.”
“맞디. 리북에 있는 거이 내 식구디. 네깟 종자들은 남이디. 암 남이구말구.”
“그라믄서 와 날 나무라능교? 내가 담밸 피우등가 술을 마시등가 와 상관잉교? 내사 나미 새끼 아닝교? 북쪽 자식이나 실컷 사랑하소.”
“기럼. 기렇구말구. 실컷 사랑하디.”
배승태는 방을 나와 문을 쾅 닫았다. 여전히 가슴이 떨렸다. 서러운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강식이 왜 저럴까? 왜 갑자기 반항하는 걸까? 중학생일 때 일시 말썽을 피운 적이 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던 강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따르던 착한 아들인데, 아무래도 지화가 불을 지핀 게 분명했다.
기노므 에미나이가 일을 냈군 기래.
배승태는 다시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강식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곁으로 다가간 배승태는 살며시 아들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착한 우리 강식이가 와 이러네?”
“.....”
“오마니가 뭐라구 핸?”
“.....”
“솔직히 말해보라메. 아빠가 멀 섭섭히 핸?”
“다 싫심더. 아부지도 어무이도 다 밉심더.”
“어드래서 심통이 난 게가?”
“두 분 다 지를 자식으로 여겼능교?”
“기거이 먼 소리네? 내가 왜서 열심히 장사하구 열심히 살구 있디? 막흔 넬 위해서가 아니갔어? 물론 리북 식구가 그립긴 하갔지만서두 기건 늬도 이해했잖네? 늬도 기걸 이해할 만큼 철이 들었잖네? 안 기렇네? 기러구 늬 오마니도 늬 하나만 믿고 사는 거디 멀 믿고 살갔어. 오마니가 바깥 나드리하는 건 잠시 기분 푸는 거라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잖네. 기것도 늬가 이해해야디.”
“모르겠심더. 지도 지 맘을 잘 모르겠심더.”
강식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 얼굴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묻어 있었다. 강식은 지금 아버지에게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어젯밤이었다. 어머니한테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어서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늬도 철이 들었으모 에미 맘을 이해해얀다카이. 인자 나는 늬 아부지캉 끝장을 낼란다. 늬 아부진 인간이 아이고 무쇤기라. 그라이 무쇠가 변하겠노. 앞으로 백년이 간다 캐도 인간이 안 될 사람이데이. 그런 인간하고 먼 재미로 살겠노. 여태까정 늬 땜에 참아왔지만 인잔 더 몬 참겠능기라. 늬 아부지가 언제 나를 아내로 여긴 적 있노? 자식인 늬한테도 맘을 제대로 준 적 있노? 늬를 살붙이로 여긴 적 있노 말이다. 늬나 내나 그 인간한텐 남인기라. 그 인간한테 식구는 오직 북쪽 것들 뿐이지러. 저그들은 끼리끼린기라. 하머 아주 흉한 인간이제. 그러니까 늬도 맘을 단단히 묵어야 한데이. 알갔제?”
“무신 말잉교? 무신 맘을 단단히 묵으란 말잉교?”
“그 말을 모르겠노?”
“모르니더.”
강식은 억탁을 부렸다. 엄마의 말을 죄 알아들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엉너리를 쳤다. 어머니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만날 술에 취해 살고, 집안 살림을 팽개친 채 바깥 나드리만 일삼는 어머니가 곱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 아버지와 헤어지겠다니.
바람이 난 게 틀림없어.....
강식은 두 달 전에 본 그 광경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과외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 근처 공원길을 걸어갈 때였다. 보안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사된 숲 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숲이 우거진 여름철이면 밤중에 종종 보아온 광경이어서 그냥 지나칠 참이었다. 보나마나 풀섶에 나란히 앉아 속삭이거나 기껏해야 입을 맞추는 정도가 고작인데 이번에는 간드러진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낯익은 웃음소리였다. 강식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두 남녀가 어깨동무를 한 채 잔디밭으로 걸어나오더니 뺨을 부비고 나서 각자 헤어졌다. 혼자가 된 여자는 비틀거리며 아파트 단지를 향해 걸어갔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분명했다.
먼저 집에 돌아온 지화는 뒤따라 들어온 아들을 보고도 아직 멍한 시선으로 허공만 더듬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을 정답게 맞아들이던 평소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저녁을 먹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강식은 그 이튿날부터 난생 처음 불량학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아부지는 와 어무이 맘을 모르시능교?”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강식이 고개를 숙인 채 배승태를 책망했다. 어느새 강식의 눈자위에 눈물이 젖어 있었다. 배승태는 강식이 기특했다.
“내레 어드러케 늬 오마니 맘을 다잡갔어. 오마니는 원래 나를 남편으로 여기디 않은 거라메.”
“와요?”
“나를 빨갱이로 여긴 거라메. 빨갱이는 독하고 악한 인간이구. 게다가니 따지기 좋아하구,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구. 전투적이구, 우리 민족을 불행하게 만든 악마구, 강식이 늬도 여태까정 기러케 배웠잖네? 기런 나를 늬 오마니가 진정으로 사랑하갔네?”
“그럼 와 지를 낳았능교?”
배승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로 대답해줄까? 배승태는 한참동안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꾸해주었다.
“기러니께니 아바디는 늬를 불상히 여기는 거라메. 불쌍하니께니 더 사랑스런 게구. 내 말 알간? 기러구 부부간 정하구 자식 사랑은 다르잖네? 자식을 사랑 않는 부모가 어딨갔네.”
“저를 사랑한다꼬요? 진짜 사랑하는 자식은 북에 있잖응교?”
“머이? 늬놈도 늬 오마니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늬놈은 자식이 아니고 머디? 기러구 나는 늬를 위대한 존재로 여기고 있어야. 어드래서 위대한디 알간? 대답해보라메. 왜서 위대하디?”
“모르겠심더.”
“빨갱이하구 빨갱이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니께니 기러티. 기걸 보고 야속한 운명이라구 하잖네? 야속한 팔자, 참 멋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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