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9회)

충남시대 2023. 6. 27. 11:21
공비도 아내를 팽개치능교?

 

 

  “이잔 빨갱이 때를 훌훌 벗고 밝게 살아보레이.”
  “머이? 빨갱이?”
  “빨갱이카모 어둡잖나. 지옥처럼 어두분 게 빨갱이 아이가. 난 세상을 밝게 살란다.”
  “려편네가 맨날 술을 도가니로 마셔대구, 사내들 껴안구 히히대는 거이 밝게 사는 게가? 기건 배때기 불러개디구 지랄떠는 거라메.”
  “역시 빨갱이 말투군. 늬캉 내캉은 연분이 아닌기라. 일찌감치 구정을 내얀다카이. 미친 인간!”
  지화는 꽥 소리를 내질렀다. 장사도 당장 때려치우자며 남편을 꼬나보았다. 배승태는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멋대로 하라메. 날래 치우면 내레 편해 좋디.”
  “자식도 날래 치우소. 강식은 당신 자식이 아니잖소. 강식을 북쪽 자식만큼 생각했능교?”
  지화는 입을 벌린 채 헤헤거렸다. 배승태는 지화가 아주 헤어지기로 작정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작별이 섭섭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

 

  동호에게 포항생활을 대충 털어놓은 배승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화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무척 참았다는 말과 자기의 잘못이 크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지화한테 잘해주려고 애를 썼지만 지화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고 했다. 
  “오기가 생기더군. 속으로 외쳤디. 네 멋대로 개지랄떨라메. 늬년이 먼 지랄을 떨건 나하군 상관없디야. 암 기러티. 내 맘은 리북 식구한테만 있디. 기러케라도 맘을 다잡고 싶었더랬어. 맘을 제꺽 옹그리디 않군 미치갔더라구.”
  배승태는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기래도 가정파탄만은 막으려구 포항 집과 상가를 팔아개디구 서울로 이사했디. 지화가 고향을 떠나 너른 데서 살믄 사람이 달라지겠디 생각했더랬어. 기런데 서울에 와서도 몇 해 지나니깐 또 집을 비우기 시작한 게야. 에미나이는 아주 약은 여자라메. 사람을 리용가치로만 따진 게라구. 정을 모르는 여자였디. 서울로 간 거이 되레 잘못이었어. 얼굴이 반반하고 넉살이 좋으니께니 여게저게 안 낀 데가 없었어. 선거 때마다 쏴다니더만 감투도 여러 개 꿰찬 게야. 무슨 회장, 무슨 고문, 무슨 자문위원, 무슨 상임이사, 무슨 사무국장, 세상이 요지경이디. 쎄미나 한답시고 사내들과 어울려 밤을 새기 일쑤였어.”
  “그거야 사회활동 아닌가?”
  “사회활동? 기거이 머네? 옳은 일을 하는 거이 사회활동 아니갔어? 사회를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거이 사회활동 아니네? 비뚤어진 걸 바로세워서 공익을 창출하는 거이 목적이잖네? 제도적으로 취약한 곳을 가려개디구 어루만지고 개선하는 봉사가 사회활동 아니갔어?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거이 사회활동 맞디? 긴데 끼리끼리 명분을 내세워 이권을 챙기고 심지어 국가 예산까지 뜯어먹는 거이 사회활동이네?” 
  배승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동호는 잠자코 들어주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아들은 지금 뭐하는가?”
  “강식이 떠나지만 않았어두 안해와 살았갔디.” 
  “아들이 떠나다니?”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서 놀다가니 몰래 사라졌어. 수소문을 했디만 소식이 감감했디. 에미나이도 모른다는 게야. 죽었는지도 모르갔어. 기놈이 성깔은 더러도 맘은 고왔디.”
  “지화 씨와는 아주 헤어졌는가?”
  “기럼.”
  “헤어진 걸 후회하진 않나?”
  “후회가 머네. 거더 강식이 생각만 간절하디.”

  “아들 걱정은 말게. 아마 어디에 숨어서 잘 지낼 걸세. 나중에는 꼭 아버지를 찾아올 거라구. 그게 핏줄이지.”
  “기럴까? 어드러튼 내 잘못이 크디야. 맨날 에미나이한테 신경을 쓰다보니께니 아들놈한텐 소홀했디.”
  배승태는 앉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동호가 따라준 술을 마시고 나서 강식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강식은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싸움질로 세월을 보냈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논다니들과 어울려 술에 젖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게 일상이 되다시피했다. 점점 성격이 포악해진 강식은 오토바이를 더 사납게 몰고 다니며 여자 희롱을 일삼았고 그 일을 아버지 앞에서 떳떳하게 지껄였다. 한번은 시골 외딴 도로에서 농촌 처녀를 태워다 산 속에서 겁탈했노라고 일부러 자랑삼아 떠들었는데 강식은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괴롭혔다. 강식은 술을 진탕 마신 채 오토바이를 타고 마당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다.
  “공비도 아내를 팽개치능교?”
  그때 배승태는 화를 참으며 이렇게 대꾸해주었다. 
  “내가 팽개친 거이 아니잖네? 내레 늬 오마니를 붙잡았잖네? 기래두 빨갱이완 살기 싫다구 떠났잖네? 기건 늬도 알잖네? 안 기렇네?”
  그 말을 들은 강식은 며칠 뒤 짐을 챙겨 집을 나갔고, 2년 동안 아들을 기다리던 배승태는 재산을 정리해서 서울을 떠났다. 강식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동호는 배승태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어느새 바다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동호는 바다를 내다보며 옛날의 밤바다를 떠올려보았다. 캄캄한 바다, 서치라이트가 어둠속을 감시하던 바다, 어선 통제로 불빛과 통통 소리가 사라진 바다, 그게 칠팔십 년대의 밤바다 모습이었다. 
  “내레 갈 데가 어데간? 생각해봤디. 기때 떠오른 곳이 여게야. 제꺽 생각 못한 거이 후회되더군. 여겐 내 피와 희망이 꿈틀대던 곳이디. 전사로서 투쟁한 곳, 투쟁하다 검거된 곳, 내 맘 알갔어?”    
  “알고말고지.”
  “기러구 자네와 매일 만났던 유치장도 그리운 곳이디. 철창을 사이하군 밤새 지껄이던 시절....”
  “자네가 이북 생활을 회상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군. 특히 연애시절을 회상할 때면 자네 몸에서 불꽃이 타올랐지. 꼭 미친 사람 같았어.”
  “당연하디. 기땐 절박한 환경이었잖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