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는 개처럼 다룰 수밖에 없어
폐정이 되고 간수들이 죄수를 압송하자 동호는 방청석 뒤쪽으로 걸어갔다. 예상한 대로 사십대 후반의 낯익은 여인이 뒤편에서 손수건으로 입을 싸쥔 채 울고 서 있었다. 배승태의 누님이었다. 마침 창으로 스며든 엷은 햇살이 그녀의 하얀 옷깃에 빛가루를 뿌렸다.
“수고하셨심더. ”
여인은 인사말을 주고 나서 지난번 동생을 면회시켜준 배려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동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두 손을 내밀어 동호의 손을 살포시 감싸쥐었다. 한복 차림인 여인의 몸에서는 풀내가 설핏했다.
“일이 잘 돼갈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동호의 말에 여인은 또 눈물을 흘렸다.
“유죄등가 무죄등가 법이 알아서 하겠지만서도 동생을 껴안아보지 몬하는 처지가 더 가슴 아프니더.”
“결심공판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면회시켜드릴 테니 그때 동생의 마음을 달래보시죠.”
“고맙심더. 이 은혤 우째 갚아드려야 할능고....”
“은혜랄 게 있나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인들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와 죄가 없겠십니꺼.... 차라리 저 애와 함께 죽고 싶으니더.”
여인은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보시다시피 계속 자수를 부정하고 있으니 참 답답합니다.”
“동생은 뭘 착각하는 게 아닝교? 그런 식으로 떼를 써야 살 방도라고 생각하는 게 아닝교? 북에 있는 가족도 걱정할 테고예.”
“물론 가족의 안전도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동생분은 추호도 자수의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아닙니더. 그 앤 진정 자수할 맘이었을 겁니더. 여긴 부모 형제가 있는 땅인기라요. 지는 그 앨 데리고 꼭 부모님 산소를 찾을 겁니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있습니다. 그 의문을 꼭 밝히고 싶은데 동생분은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
“그기 먼데예?”
“아예 자기가 총을 쐈는지 안 쐈는지 그 사실조차 전혀 기억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몽유병자처럼.”
“몽유병자라카모, 동생이 총을 빼주는 순간 꿈속을 헤맸다는 말잉교? 자수할 의사는 없었는데 그 때문에 총을 몬 쐈다, 그 말씀입니꺼?”
“다시 산에 들어가려고 부뚜막에 밥을 놔둔 사람이 총을 안 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우째든가 총을 안 쏜 건 사실 아닝교?”
“반의사적인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검찰측 주장과 같네예. 발사 의지가 꺾였다는....”
“아니죠. 제 생각은 충분히 쏠 맘이었는데 왜 안 쐈냐는 거죠. 순간적으로 어떤 심리가 작용했는지 그걸 밝혀야 하는데 당사자는 그걸 숨긴 채 쐈다고만 억탁을 부리니....”
동호는 검찰측 주장과의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심리예?”
“제 생각엔 어떤 심리작용에 의해서 총을 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심리가 먼데예?”
“글쎄 그 속내를 본인이 내비쳐야 하는데....”
“강 형사님은 잔인한 분이십니더. 넘어진 송아지를 구경만 하실랍니꺼.”
“무슨 말씀인가요?”
여인의 난데없는 태도에 동호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 동생에게 필요한 게 뭐겠능교? 막연한 동정심만으로 그 애 마음을 녹일 수 있겠능교? 이십 년 간 얼어붙은 동생입니더. 그런 사람을 강 형사님의 정서에 맞춰 판단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지금 동생한테는 살과 살이 비벼지는 동물적인 인정이 필요하니더.”
“동정심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동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동호가 유치장으로 배승태를 찾아간 것은 공판 다음날 밤이었다. 예상한 대로 배승태는 동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동호는 오해를 풀어주려고 자상한 눈빛을 보였지만 배승태의 얼굴은 점점 더 표독스러워졌다. 배승태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일 수 없다고 판단한 동호는 일부러 얼굴을 험하게 구겼다. 울고 싶은 사람에게는 실컷 울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듯 되레 배승태의 분노를 터뜨려 주는 것이 오해를 푸는 데 이로울 성싶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랄까, 분노를 터뜨리고 나면 몸이 나른해진다. 그때 비로소 말이 통할 수 있게 된다.
“개새끼는 개처럼 다룰 수 밖에 없어!”
동호는 갑자기 욕을 퍼대기 시작했다.
“개새끼들에게는 인간적인 정을 베풀 가치가 없다 그 말이다. 그동안 네놈의 솔직한 태도가 좋아서 사람대접을 해줬는데 비밀을 지켜준 내게 적대감을 품어?”
그렇게 억지로 화를 내면서 배승태의 표정을 세밀히 살핀 동호는 얼른 자리를 떴다.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치장을 빠져나온 동호는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밀려오는 갯바람이 모처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주었다. 유난히 반목과 질시가 깊던 고향마을이었지만 그곳에는 늘 한줌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문석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문석구는 나이가 네댓 살 위턱인데도 항상 동호와 또래처럼 놀아주었다. 산딸기를 따서 동호의 손에 쥐어주고, 동호가 발목을 삐었을 때는 집에 업어다준 문석구의 우정은 가장 아름다운 고향추억으로 남아있다.
옛 생각을 털고 난 동호는 밤이 이슥해서야 다시 감방을 찾아갔다. 취침시간이 깊었는데도 배승태는 담요를 마루구석에 가지런히 개켜놓은 채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취침시간에 머리를 빗질한 그 단정한 용모가 되레 불안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고 보니 철책 앞 수도꼭지에 걸려 있는 마루걸레가 깨끗이 헹구어져 있었다. 배승태는 반항심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동호는 복도에 서서 배승태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독방을 쓰는 만큼이나 특별한 죄수요. 중범이란 뜻이 아니라 일반 죄수와 다르다는 거요.”
하지만 배승태의 차돌 같은 눈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동호는 말을 계속했다.
“옛날 우리 고향에는 문석구란 단짝 친구가 있었소.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지만 문석구는 나를 단짝친구로 대해주었소. 하지만 아버지는 문석구를 빨갱이 자식이라고 상종을 못하게 했는데 당신이 그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소. 내가 당신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 친구와의 추억이 작용했을 거요. 우리 탁 털어놓고 얘기해봅시다. 당신은 지금 날 오해하고....”
그때 갑자기 싸늘한 욕지거리가 냉큼 동호의 말을 잘랐다.
“뭐가 어드레? 오해라구? 이 간나새꺄! 네깟 놈들 짜구 부리는 수작이니께니 멋대로 하라메.”
'연재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5회) (0) | 2023.05.23 |
---|---|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3회) (1) | 2023.05.09 |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1회) (1) | 2023.04.25 |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0회) (1) | 2023.04.18 |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9회) (0) | 202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