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 남조선엔 가족이 없수다레
봄볕이 따스했다. 눈이 녹아 질퍽하던 경찰서 마당도 땅이 보송보송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공판을 앞두고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마당으로 나온 동호는 무심코 양지녘에 서서 압송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마 검사실로 검취를 받으러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간수 서너 명이 오륙 명의 죄수를 굴비 두름처럼 포승으로 엮어 압송하는 중인데 그 중에서 늙수그레한 죄수 하나가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직원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수갑이 너무 죄어져 피가 안 통한다고 엄살이더니 이젠 오줌타령이야? 암 소리말고 그냥 참아요.”
검찰청은 가까운 이웃인 데다 모두 함께 포승을 질렀으니 한 사람을 빼기가 힘들다며 참으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영감은 막무가냈다.
“그럼 바지다 싸란 말야?”
“그러니가 아까 미리 싸랬잖아, 이노므 영감탱이야.”
“오줌이 이제 나오는 걸 어쩌란 말야. 좆대가리를 묶어매주던가.”
“좋아. 끄집어내. 철사로 묶게.”
“씨팔 손 묶이고 몸뚱이 묶이고 쫒까지 묶여?”
“그러니까 누가 사기치랬어?”
“누가 일부러 친거야? 버릇이 그런 걸 어떡해?”
“버릇이 그러니까 벌도 깨끗이 받아야지.”
“버릇도 벌주는 법 있어? 당신네들은 버릇이 한 가지도 없단 말야?”
“물론 있지. 이불 속에서 팽이치는 것.”
“모두 인정머리라곤..... 에라 모르겠다. 더러운 몸뚱아리 아무렇게나 굴리면 어때. 여기다 싸지 뭐.”
영감은 묶인 손으로 정말 오줌구멍을 열려고 했다. 간수 하나가 달려들어 포승을 풀고 수갑만 채운 채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에 다녀온 간수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저노므 영감탱이는 진짜 사기꾼야. 화장실에 가서는 오줌도 안 싸더라구. 바깥공기를 더 마시고 싶어서 일부러 뗑깡을 놨다나? 하하하하.....”
“이노므 영감탱이 이번에는 늙어서 봐주지만 한번만 더 그땃짓 했다간 뺑뺑이 칠거야. 알지?”
다른 직원이 엄포를 놓았다. 동호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유치장 쪽으로 걸어갔다. 오후에 열릴 공판을 위해 배승태를 압송해야 했다. 유치장에 들어선 동호는 배승태의 몸에 포승을 지르며 물었다.
“이십년 만에 누나를 만나볼 텐데 기분이 어때요?”
하지만 배승태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왜서 그딴 짓을 합네까?”
“누나를 만나는데 그딴 짓이라니?”
“임무에 반하는 짓이외다.”
“임무? 그게 뭔데?”
동호는 일부터 딴지를 걸어보았다. 그런 어깃장을 통해 배승태의 속내를 캐볼 참이었다. 하지만 배승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면회는 검사실에서 이루어졌다. 검사실에는 담당 검사와 누나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배승태를 수갑만 채워 검사실로 들어선 동호는 배승태를 누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햇살이 스며든 검사실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무장공비가 혈육을 만나는 장면을 처음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누나는 조심조심 배승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배승태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 눈씨 한 점 까딱하지 않았다. 누나가 곁으로 바짝 다가가 머리를 만지려 하자 매몰차게 누나의 손을 밀쳐냈다. 하지만 누나는 억지로 배승태의 머리칼을 들춰 귀밑을 살폈다. 그때 까만 반점이 나타났다.
“맞다! 어무이가 말씀하신대로야! 내 동생 맞다카이! 승태야!”
누나가 동생을 껴안고 몸부림을 쳤다. 엉엉 울다가, 동생의 몸을 쓰다듬다가, 얼굴을 뺨으로 부비다가, 다시 부등켜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배승태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눈만 감고 있을 뿐이었다.
“승태야, 늰 내 동생이데이. 내 동생이 맞다카이. 어무이는 늴 보고 싶어 눈을 뜬 채 돌아가셨능기라.”
누나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몸부림을 쳐도 배승태는 눈을 감은 채 날카로운 목소리만 뱉아냈다.
“내레 남조선엔 가족이 없수다레. 사람을 잘못 봤시오.”
“그게 먼 소리고. 사람을 잘못보다니 그게 먼 소리고. 승태야 늰 내 동생인기라. 하늘이 무너져도 늰 내 동생인기라.”
누나는 계속 몸부림을 치며 눈물을 흘렸지만 배승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사람을 잘못 봤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배승태가 눈을 떠봤으면....
동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면 분명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동호는 그가 어서 눈뜨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배승태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앙다물고만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동호가 배승태에게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나쁜놈! 네놈이 뭐가 잘났다고 혈육을 속이는 거야? 적화통일사업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누나도 모르는 척해, 이 나쁜 놈아!”
그러자 누나가 동생의 역성을 들었다.
“형사님, 우리 동생한테 욕하지 마이소. 누나를 끼안고 싶어도 일부러 저럴 겁니더. 제 동생 처지도 살펴주이소. 인자 누나 품에 안길 테니까네 아무 걱정 마이소.”
누나의 역성에도 배승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검사 역시 아무 말 없이 지그시 눈만 감고 있었다. 누나 혼자만 동생의 몸을 껴안고 몸부림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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