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1회)

충남시대 2023. 4. 25. 11:08
부뚜막에 놓아둔 먹다 남은 밥사발

 

 그런 난처한 입장을 예견해서 생각해둔 핑계가 있기는 한데 그 또한 어색한 변명에 불과했다. 송두문은 계속 행방불명 쪽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종종 허는 말이, 들녘이서 머슴살이나 허겄다고 푸념했걸랑유.”
  “어디로 갔는지 전혀 집히는 데가 없습니까?”
  “당최 모르겄는디유.”
  “막역한 고향친군데 행선지를 모르다뇨?”
  “암 때구 기별을 주겄쥬.”
  변호인은 황억배를 증언대로 세우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송두문의 증언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피고가 가슴에 품었던 권총을 꺼낸 것은 어느 순간이었나요?”
  “즈이 작대기에 두들겨맞고 금방유.”
  “어디다 대구 조준했나요?”
  “지 가슴팍에다유.”
  “불발이었다죠?”
  “예에.”
  “불발인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 방아쇠를 두세 번 댕기구 혔는디두…….”
  “방아쇠 당기는 검지의 움직임을 보았습니까?”
  “예에.”
  “그 긴박한 순간에 검지의 동작이 눈에 띄었다, 그 말 입니까?”
  송두문은 그제야 변호인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묻는지를 거니채고 말에 힘을 주었다.
  “분명 봤당게유. 안 쏴징게 재차 삼차 방아쇠를 댕겼슈.”
  “경찰관의 증언에서는 증인이 지서에서 황억배씨가, 실인즉슨 하고 말문을 열려고 하자 무슨 눈치를 주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그건 사실인디유 암 뜻도 아녔슈. 그냥 황씨가 주변머리가 읎어가지구 엉뚱깽뚱한 말이라도 지껄일까봐 그랬쥬.”
  “엉뚱한 말이라뇨?”
  “자기가 먼점 내쳤더라면 공비는 진작 뻗었을 틴디 내가 먼점 뎀비는 바람에 황천길로 갈 뻔혔다는 둥 너절한 말을 늘어놀 게 뻔허쥬. 그러구 그 사람 말 백 마디 중에 아흔 마디는 꼭 앞대가리에 실인즉슨이 따라붙어유.”
  송두문은 법정임을 까막 잊은 채 잡담처럼 지껄여댔다. 그의 지악스런 말솜씨를 귀담아들은 변호인은 판사석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다음에는 검사의 신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배승태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먼저 아궁이 앞에서 졸 때의 정황과 작대기로 처음 맞았을 때의 정황을 캐물었다.
  “아무 정신이 없었습네다.”
  “정신이 없는데 총을 꺼내 발사하다뇨?”
  “버릇이디오. 죽어가면서도 쏠 수 있으니께니......”
  “방아쇠를 몇 번 당겼나요?”
  “수차례디오.”
  “그래도 격발이 안됐나요?”
  “기러티오.”
  “칼을 소지했는데 왜 쓰지 않았죠?”
  “인차 빼앗겼시오. 힘들이 된통 쎄개디구 대항을 못했습네다.”
  고개를 끄덕인 검사는 이제야 진짜 의중을 털어내리라 다짐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총을 쏘고 안 쏘고의 문제일 수만은 없습니다. 비록 쏘지 않았다 해도 다급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사격의지가 꺾였을 뿐입니다. 잠결에 작대기가 장총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기소 여건을 보강하려는 검사의 날카로운 신문이 전개되자 법정은 또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문에 적극 대응하려는 변호인의 변론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 같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희생물이야.”
  “세상을 몰라서 죽으려는 거야.”
  “속고 살아서 저래.”
  눈물을 흘리는 여인네들도 보였다. 변론이 이어졌다.      
  “피고는 특수훈련을 받고 남파된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계적으로 즉발하도록 훈련을 쌓았습니다. 잠결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무의지적 상태에서의 행위는 바로 습관적인 동작을 유발합니다. 가슴 속에 품은 권총을 꼭 쥐고 잘 정도로 방어태세가 완벽한 피고가 총을 꺼냈으면서도 발사를 억제한 행위는 자수의사가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괴성이 법정에 찬물을 껴 얹었다. 배승태가 재판절차를 무시한 채 소리쳤던 것이다.
  “졸던 중인데 어케 항거합네까? 길코 산에 있는 동무한테 주려구 먹다 남은 밥을 부뚜막에 놔뒀더랬는데, 기거이 자숩네까?”
  난데없이 터져나온 밥그릇 얘기에 법정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상황이 뒤바뀌자 맥이 풀린 검사는 할 말을 잊은 듯 표정이 멍했다. 비장의 무기가 이제는 녹슨 폐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비장의 무기는 바로 피고인 스스로가 폭로한 부뚜막에 놔둔 먹다 남긴 밥이었다. 
  “배가 고픈데도 밥을 남긴 건 산에 숨어 있는 동료를 생각해서 그랬죠?”
  “기러티오.”
  “만약 검거되지 않았으면 어쩔 참이었죠?”
  “말이라구 합네까? 다시 전투해야디오.”
  “이상입니다.”
  검사는 자리에 앉았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안 했다고 빡빡 우겨야 신문할 맛이 나는데 되레 도둑질을 했노라고 빡빡 우긴다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동호는 답답했다. 체포인지 자수인지 진실만은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이 물거품이 될 지경이었다. 그 답답한 마음을 변호인이 풀어주었다. 
  “피고는 밥을 챙길 당시만 해도 자수의사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밤 새 마음이 달라졌던 겁니다. 피고는 그 달라진 속내를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배승태가 또 재판절차를 무시한 채 변호인에게 소리쳤다.
  “머가 어드레? 간나새끼! 네가 먼데 자수라고 우기는 게가!”
  배승태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방청석의 모든 귀와 시선이 피고인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