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5회)

충남시대 2023. 8. 8. 12:01
당신들 이 따위로 근무하기야!

 

퇴근 후에 교동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신 동호는 자정이 넘자 숙직실에서 잠을 자기 위해 경찰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통금에 묶인 아스팔트길은 발자국 소리가 울릴 만큼 조용했다. 도로 양 켠으로 펼쳐진 들판에는 대여섯 개의 방범등이 어둠을 밝히고 그 잔영이 파출소 건물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왜 파출소에 불이 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사위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미진 시골길에서 들었다면 소름이 끼칠만큼 음침한 목소리였다.
  “구평이지?”    
  동호는 어둠 속에 대고 소리쳤다.
  “네 접니다. 한잔 하셨군요?”
  “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쉬었다 가시죠.”
  “또 인생론을 강의할려구?”
  “여기에 삶은 문어와 초장이 있습니다.”
  “술도 있겠군.”
  가까이 다가가자 구평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출입문 밖 정원석 안반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출입문은 활짝 열려 있고 소내근무석에서 간들거리는 감씨 만한 촛불 하나가 벽과 책상 위에 우중충한 환영을 그리고 있었다.
  “자네를 어서 파면시켜얄 텐데.”
  “자의로는 물러날 수 없으니 타의로라도 구제해줬으면 해요.”
  “왜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켰는가? 전화 벨소리가 들리도록 문을 열어놨으니 그걸 근무상태로 인정해야겠군.”
  “지겨워 죽겠어요. 사람 소리는 고사하고 새 소리도 안 들려요. 공연히 시골 근무를 자청했나봐요. 서울 같으면 지금쯤 파출소가 시끄러울 텐데.”
  “시끄러운 게 좋은가?”
  “그게 아니라 여기가 너무 조용하다는 거죠.”
  “조용하다고? 해변에 쳐진 철조망을 보게나. 그런 말이 나오겠나. 중앙에서는 병력을 자꾸 증원한다네. 자네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게. 그건 현실적인 문제니까. 현실보다 더 중요한 게 뭐겠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배승태 사건을 비현실적으로 다뤘나요?”
  “비현실적이라구? 그것관 다르지. 적은 적이고 양심은 양심이고.”
  “정의는 정의고..... 그 빌어먹을 정의!”
  “또 타령인가?”
  “드시죠.”
  굳이 마다하는 동호의 손목을 꽉 잡고 구평이 소주를 따랐다. 
  “콜린 윌슨이라는 사람이 말했죠. 실존주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고요.”
  “나 그냥 갈라네. 골치가 띵띵 아픈 사람한테 더 골치 아픈 소릴 해?  나는 무식해서 그런 얘긴 못 알아들어.”
  “그러니 선배님을 타락이란 눈금에 놓고 재단해야겠죠?”
  구평이 동호의 손목을 잡은 채 난데없는 말을 계속 지껄였다. 
  “저는 자꾸 제 껍질을 벗기고 싶어요. 양파 같은 제 껍질을 벗기고 벗겨서 보이지 않는 제 속이 나올 때까지 벗기면..... 씨팔 죽고 싶어요. 도대체 저는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어요. 왜 뚱딴지같은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밝은 세계를 찾는데 저는 왜 자꾸 굴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보석을 캐려면 굴속으로 들어가야잖아?”
  “히야, 역시 우리 선배님은 멋쟁이야.”
  “어림잡아 해본 소리네. 자네한테 아부 좀 했지. 그나저나 지금 서울서는 야단이라네.”
  “걱정할 것 없어요. 계엄령이면 만사 오케인데요 뭐.”
  “자네나 나나 월급 받는 것만큼만 생각하며 살자구. 그 이상 생각하는 건.....”
  “그 이상 생각하는 건 뭐죠?”
  “......”
  “말씀을 못하시는군요.”
  “술이나 한잔 더 딸게.”
  구평이 동호의 빈 술잔을 채웠다.
  “이것만 드시고 그만 드세요.”
  “아부하는 건가?”
  “네.”
  “아부 싫어. 자넨 언제까지나 나한테 시비를 걸어야 해. 내가 썩지 않도록,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술판을 치우도록 해. 술 좀 마셨다고 근무 소홀하면 안 돼. 뒤숭숭한 시국인데 주문진 사건 같은 게 안 터지란 법 없네.”
  주문진 사건은 무장공비들이 국군 복장을 하고 주문진항 임검소를 습격하여 임검경찰관을 죽이고 주민등록증을 탈취해가다 사살된 사건이었다. 그때 동호를 따르던 염경장이 등에 칼을 맞고 순직했는데 칼자국은 정교하게 빨치산 표시로 찍혀 있었다.
  이슥한 밤이었다. 근무교대가 이루어진 임검소에는 염 경장과 박 순경과 십대 사환이 남아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어선이 빽빽이 정박 중인 항구에는 무거운 적막이 쌓여갔다. 박순경이 부두 순찰을 돌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국군 복장을 한 장교와 사병 등 다섯 명이 불쑥 임검소에 들어와 다짜고짜 경찰관을 닦아세웠다.
  “당신들 이 따위로 근무하기야!”
  “우리 근무 태도가 어때서?”
  “상관이 이 따위로 근무시킬 리 없잖아!”  
  얼떨결에 당한 수모여서 염 경장은 조리 있게 따질 새가 없었다. 군인이 경찰업무에 시비를 걸다니, 자존심이 상한 염 경장은 숨을 돌리고 나서 장교한테 항의 조로 대들었다. 그때였다. 염경장 뒤에 서 있던 하사관이 단도로 염 경장의 등을 찍었다. 염 경장이 쓰러지자 괴한들은 사환을 책상다리에 묶어두고 주민등록증만 탈취해서 달아났다.
  사환은 두려움보다 어서 공비습격사건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팔목과 손목을 뒤로 묶은 포승을 벽 모서리에 문질러댔다.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계속 문질러 포승줄을 끊은 사환은 즉시 지서로 달려가 습격사건을 알렸고 순식간에 비상이 걸렸다.
  경찰과 예비군이 출동해서 항구를 뒤졌지만 공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방파제에 숨어 바다를 응시하던 감시근무자의 눈에 어둠이 깔린 물 위에서 무엇이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일제히 총알을 퍼부었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응사해왔다. 사격이 끝나고 어른거리던 모습도 사라졌다. 날이 밝자 그곳에는 고무보트 하나가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지휘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황 분석에 골몰했다. 그때였다. 서장이 부하 직원에게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