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튼 전쟁 후의 피해는 금전적 손실 말고도 정신적 시간적 피해 또한 만만찮았다. 칼로 물을 베는 싸움이면 원상복귀에 일초도 안 걸리지만, 여기저기에 칼자국이 흉측한 집안을 상상해 보라! 또 상처난 가구를 교체하기 위해 가구점을 뒤지고 다니는 심정을 상상해 보라. 가구를 새로 들이는 데도 부숴버린 가구보다 더 나은 제품을 들여놔야 그나마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다. 전보다 못한 것을 들이면 상심을 달래지 못해 전쟁 후유증은 오래 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더 좋은 가구를 사기 위해 오랜 시간 고심하며 가구점을 뒤져야 하는 그 수고는 상상만 해도 징그럽다. 아내에 대한 실망은 거기에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을 일이 있잖은가. 아내보다 성질이 더 급한 나도 부엌칼을 들고 설치진 않는다. 한번 들으면 어딘가를 찍어야 상대방한테 체면이 서는 법이니 그 비참한 자존심의 횡포 때문에라도 칼을 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소파에 놓인 쿠션이나 방석 따위를 내던지는 게 고작이었다. 딱 한번 골프채를 든 적이 있지만 이것저것 고르다가 기껏 화분 하나를 부수고 말았다.
“썅! 모두 작살내고 말 거야!”
말뿐이었다.
나는 싱크대 속에 꽂혀있는 식칼에 신경이 예민해지곤 한다. 아내의 갑상선 질환 때문인데, 갑상선이 나빠지면 감정조절이 힘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내는 말했다.
“집안에 날카로운 물건 두지 마세요. 도저히 감정을 조절할 수 없어요. 이러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어요. 나 자신이 겁나요.”
그 말을 들은 후로 나는 기가 꺾인 게 사실이다. 겁주려고 일부러 칼을 들었으리라 생각하면 아내의 그 속보이는 작전이 가소롭지만 갑상선 환자란 생각이 들면 겁이 났다. 너 죽고 나 죽자고 대들면 대책이 없잖은가.
극히 드문 예지만, 우리 부부는 이불 속에서 싸운 이색적인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 좋은 대화와 애무로 무드를 잡기 시작해서 잠옷까지 벗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팬티만 입은 아내가 갑자기 돌아누웠다. 살을 섞지 않겠다는 시위였다. 침실에는 금방 먹구름이 꼈다.
“왜 그래?”
“몰라서 물어?”
안미희 탓이다.
“언제 적 일인데, 자꾸 곰파는 거야.”
“불과 삼 년 전인데 언제 적?”
“그럼 어쩌란 말야. 지난 일을 가지고 어쩌란 말이냐구.”
내가 조심스레 꼬리를 내려보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로 내 몸을 밀쳤다. 다시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일은 깨끗이 잊고 새출발하자고 달래보지만 아내는 자기 옆구리를 감싼 내 팔을 홱 뿌리쳤다. 드디어 내 입에서 독기가 뿜어져나왔다.
“꺼져!”
“꺼지라면서 왜 팔은 잡아!” ”
나는 꺼지라고 소리를 치면서도 어느새 아내의 팔을 잡았던 모양이다. 말은 꺼지라고 하면서 함께 자고 싶은 그 모순이 내 약점이고, 아내는 그 약점을 무기로 사용했다. 베개와 이불을 챙겨 서재로 사라짐으로써 나를 환장하게 만드는데, 우리의 이불 속 전쟁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우리 전쟁의 별난 점은 피차 적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어이없는 사실에 있었다. 전쟁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가 적 사살인데, 이놈의 전쟁은 오히려 적이 죽을까봐 휴전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내가 “으윽!” 하고 벌렁 나자빠지거나 숨이 넘어갈 듯 칵칵거리며 가슴을 쥐어뜯으면 즉각 휴전이 성립되고, 냉수를 마셔주랴 팔다리를 주물러주랴 적을 살리려고 허둥댔다. 전쟁 상황에 따라서는 앰뷸런스를 부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응급실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오 신이시여! 저 여인을 살려주소서! 만약 저 여인의 숨이 멈추게 되면 제 숨 또한 멈출 수밖에 없나이다!”
그러면서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다.
아내도 나처럼 간절할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내가 졸도한 적이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보나마나 아내는 평소에 자주 흘렸던 그런 시시한 눈물을 흘렸을 테고, 나처럼 절통하면서도 아주 철학적인 눈물을 쏟진 않았으리라. 진실의 깊이랄까, 나와 아내의 다른 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부부싸움과 아내사랑을 100미터 높이로 차이를 두지만 아내는 1미터 차이도 두지 않았다. 아내한테 부부싸움은 곧 사랑의 제로 상태를 의미했다. 물론 오랜 세월 칼로 물을 베다보니 지쳐서 그리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또한 나와 다른 점이다. 나는 부부싸움을 백 번하든 천 번하든 아내에 대한 애정은 일직선인데 비해 아내의 나에 대한 애정은 활처럼 휘고 만다. 여자라 그럴까? 그건 모르겠다. 암튼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의 그 인식차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제발 연애시절의 아내로 되돌아갔으면, 그게 내 소망이었다.
막걸리 1되 값을 주고 산 아내
오십년 전, 내가 일시 정보업무를 맡아볼 때였다. 동료 직원인 추 형사가 반명함판 사진이 붙은 신원조회서를 내게 보였다. 군청 임시직 직원이 정식으로 임명을 받기 위해 제출한 신원조회 의뢰서였다.
“어때? 삼삼하지?”
나이는 스물, 얼굴이 예쁘장하고, 눈이 맑다. 길에 금덩어리가 떨어져 있으면 몰래 숨기긴커녕 주인을 찾으려고 온종일 헤맬 여자 같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데다 코흘리개까지 꿰찬 홀아비 신세에 그만한 아가씨라면 하늘에서 별 따기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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