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대뉴스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세 번 떨어지고 네 번 만에 입학한 초등학교
나는 1943년 만 아홉살(실제로는 열살)의 나이에 도고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만 육세가 되던 해부터 내리 삼년 간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간단한 구두시험만 보던 때인데도 번번이 낙방하고 네번 만에 합격하여 도시의 다른 어린이들보다 3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마을에서 아버지, 어머니 닮아서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구구단을 다 외우고 일본어도 곧잘 하고 있어서 입학시험 때마다 선생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을 잘 하여 합격할 줄 알았는데 번번이 떨어졌다. 그 때는 세상물정을 몰라서 똑똑한 내가 왜 자꾸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몰랐으나 철이 든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도고면에 한 개만 있었고, 일년에 학생 육십 명만 모집하였는데 입학 지원생이 정원보다 많았기 때문에 반수 이상의 지원자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도고면 내에서 면장, 지서장 등 공무원 자식들과 각 마을의 이장, 유지의 아들 딸들을 우선적으로 뽑다보면 입학 정원 육십 명에 이르게 되고 나머지 농민들의 자식들은 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는 그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 있던 아이들을 대부분 받아들이다 보니 한 반이 아닌 세반의 학생을 뽑게 되었다. 그래서 1학년에 입학한 학생 수만도 일백 팔십명(한반 인원 육십명의 세배)이나 되었다. 몇 해전 모교 졸업식에 초청을 받아 갔더니 전교생이 약 팔십명 정도로 채 일백명도 안되는 것과 졸업생이 겨우 열아홉 명 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힘 없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그래도 이곳 저곳에서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어 피해를 줄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고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나는 위와 같이 첫 단추를 늦게 끼우는 바람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평균 삼 년 연하의 동기생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모든 인생 행로도 항상 남의 뒤를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을 때 한문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 등 한문을 배웠다. 한문 서당의 공부 방식은 아침에 서당에 가면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해 떨어질 때까지 하루종일 한문책을 읽고 쓰는 것이어서 어린아이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는 공부였다. 처음 얼마간은 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니며 배우다가, 나중에는 우리집에서 4km쯤 떨어진 도고면 금산리 삼거리에 있는 서당에 나보다 칠팔년 연상인 선배 한 분과 같이 다녔다.
그런데 그 선배는 몇 달 다니다가 서당 글 공부를 그만 두어 할 수 없이 나 혼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여섯 살의 나이로는 4km의 거리가 너무 멀고 또 가는 길 중간에 나무가 무성한 고개가 하나 있어 혼자서는 무서워서 도저히 그 고개를 넘어 걸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길이 4차선 아스팔트 도로로 확장되어 고개도 깎여 없어졌고 차량들이 줄지어 왕래하지만, 당시는 차가 다니는 소위 신작로길이었지만 하루 종일 차가 한 두 대 정도 지나가는 한적한 길이었고 고작해야 예산 장날이나 온양 장날이 아니면 보행자도 없던 길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부모님께 서당에 간다고 말씀 드리고, 집에서 신작로있는 곳까지 1.5km 정도를 걸어 나오면 신작로 네거리에 과자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당시 나의 수양아버지(할머니가 나를 오래 살라고 어렸을 때 수양아버지를 삼아 주셨음)께서 운영하고 있어 일단 그 가게에 들어가서 예산 쪽으로 가는 보행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행인이 오면 그를 따라 서당에 가고, 만일 보행인이 안 오면 그 가게에서 수양아버지가 주는 과자를 얻어 먹으면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갔다. 어쩌다가 보행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서당에 가는 날이면 하루종일 책을 펴 놓고 저녁 때 집에 돌아갈 걱정을 하느라고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급기야 저녁 때 서당에서 나와 집에 돌아올 때는 무서워서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 집에는 서당 간다고 나왔다가 중간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집에 들어가서는 서당에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거짓말쟁이, 나쁜 아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부모님이나 할머니께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다니겠다’고 말씀 드렸겠지만 그 당시는 부모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감히 못 다니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가 드디어 부모님께 들키고 말았다. 평소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이 아무 말 없이 무단결석을 하니 훈장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 것이었다. 나는 그 날 어머니로부터 대문을 잠가놓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지금도 그 당시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사람도 환경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본의 아니게 나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죄를 범한 사람을 무조건 결과만을 놓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었기에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그런 처지에서 그 방법 말고 딴 길은 없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 힘 있는 사람보다는 힘 없는 사람을 더 챙기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 나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 다음호에 계속 -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휴먼인사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4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09.06 |
---|---|
제3회 연재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09.06 |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08.17 |
양승조 충남지사 대선 공식 출마 선언, 충청권 비상한 관심 (0) | 2021.05.10 |
귀향,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 (0) | 2021.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