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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8. 17. 16:53

 

남문우 변호사님


충남시대뉴스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태어날 때부터 고생한 나

 

 나는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감밭)에서 상(相)字 옥(玉)字 아버지와 아산 이씨 순(順)字 녀(女)字 어머니에게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 밑으로는 내리 남동생 4명과 끝으로 여동생 두 명이 있어 우리 형제는 모두 일곱 남매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고생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나를 낳자마자 양쪽 모두 유종(乳腫)을 앓으시어 나는 어머니 젖 한 모금도 못 먹고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미음만 먹고 자랐다고 한다. 당시는 우유가 없던 때라 엄마 젖을 못 먹으면 밥물을 짜서 설탕을 타서 먹였으니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첫돌이 지나서도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크지도 못하여 실꾸리 만하게 작았다고 한다.

 그래도 할머니께서는 손자 자랑하신다고 나를 안고 밖에 나가시면 마을 아주머니들이 “아이고! 실꾸리만 한 것이 언제 사람 구실을 할라나?”하고 걱정 반 조롱 반 농담을 하였다는 것을 할머님으로부터 들었다. 부모님은 내가 워낙 보통 아이들에 비해서 성장 속도가 늦고 약해서 혹시 잘못될까 싶어 출생신고도 일년 늦게 하는 바람에 나는 항상 원래보다 한 살 적은 나이로 살아왔다.

 할머니께서는 혹시나 장손이 잘못될까 걱정하시어 성황당에 가셔서 비시고, 봄이면 산에 가서 나물을, 가을이면 산밤, 마, 도토리 등을 따다가 시장에 팔아 인삼을 사다가 나에게 먹였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삼을 장복했다.

 결혼 후에는 할머니로부터 이 비법을 전수 받은 아내가 주는 인삼 끓인 물을 매일 마셨다. 나는 할머니의 보살핌 덕택에 타고난 체력은 작았지만 자라면서 강단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되었다.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했던 소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얼마 안 되는 땅으로 농사를 지으시며 우마차를 가지고 벌목한 목재를 실어 나른다든지 곡식가마를 운반하는 운송업을 하셨다. 그래서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소에게 먹일 꼴을 베거나 땔감을 할 사람이 없어 항상 걱정이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일곱 살 때쯤부터 당시 고모부 댁에서 관리하던 앞산에 올라가 갈퀴로 솔가리를 긁어모아 놓으면 저녁에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지게로 운반하여 땔감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지게를 질 수 있었으므로 여름에 학교에 갔다 오면 마을 논둑에 가서 소꼴을 베어왔고, 휴일이나 겨울방학 중에는 바로 아래 동생과 같이 도고산에 올라가 낙엽을 긁어오거나 삭정이 등을 베다가 마당에 쌓아놓고 겨울을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가서 도고산을 바라보노라면 이제는 나무들이 무성하여 옛날에 나무를 하러 지게 지고 오르내리던 산길은 없어졌지만 서너살 위인 마을 선배들 따라 산을 오르내리면서 작대기로 장단맞춰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난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가 펑펑 나고요, 요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난다. 에헤야 어허야 어여라난다 디여라…”그래서 언젠가는 옛날 어렸을 때 밟아 보지 않은 곳이 없는 정든 산을 한번 오르겠다고 다짐하지만 이제는 그저 힘이 부칠 따름이다.

 한 번은 눈이 무릎까지 쌓인 한겨울에 짚신을 신고 도고산에 올라가 삭정이를 한 짐 해서 집에 와 보니 양쪽 발 뒤꿈치가 동상에 걸려 앵두만하게 부풀어 올라 아리고 아팠다. 그때 할머니가 콩 자루 속에 양쪽발을 넣게 하셨는데, 발이 빠지는 것 같이 차갑고 아렸으나 고통을 참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풀었던 물집은 온데간데 없고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아 있어 마치 신기한 의술을 배우는 듯 했다. 그후 결혼해서 한겨울에 처갓집에 가서 꽁꽁 언 감을 찬물 그릇에 담그고 한시간 가량 지나고 보니 물그릇 안에 얼음이 빠진 말랑말랑한 감 한 개와 감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얼음덩어리가 생겨난 것을 보고는 어렸을 적에 발을 콩 자루에 넣어 치료했던 이치와 상통함을 알 수 있었다.

 한번은 마을 형들과 함께 도고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 한참 하고 있는데 산 주인인 故성준경 옹이 저쪽 능선에서 우리들을 보고 “야 이놈들아, 왜 남의 산에 와서 나무를 하느냐”고 소리 지르면서 우리 있는 곳을 향하여 뛰어오는 것이었다. 형들은 모두 빈 지게를 지거나 내팽개치고 도망가 버리고 나 혼자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성준경 옹한테 잡혀 혼날 생각에 겁을 잔뜩 먹고 있는데 성준경 옹이 숨을 헐떡거리며 내 앞에 오더니 내 생각과는 달리 “문우 왔느냐, 공부도 잘하면서 부모님을 돕는 정성이 갸륵하구나. 빨리 여기 있는 나무를 짊어지고가라”고 다정하게 말하면서 오히려 형들이 해 놓은 나무까지 내 지게에 얹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성준경 옹의 넓은 아량을 잊은 적이 없다. 그 어른은 그 당시 인근에서 제일 큰 부자로 살았지만 근검절약과 근면을 생활신조로 하고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다가 1994년경에 아흔일곱을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또 자식과 손자들을 올바르게 잘 키우셔서 그 분의 손자들은 현재 사회 각계에서 큰 동량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갔더니 초등학교 후배기도 한 그 어른의 손자 되는 사람이 “형님 때문에 우리들은 할아버지로부터는 늘 혼나면서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에게 ‘문우를 닮으라’면서 많이 혼냈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어른의 영전 앞에 엎드려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명복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겨울방학 동안에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등잔불 밑에서 양말과 장갑을 떠서 동생들을 신기고 나도 신었으며, 짚을 가지고 짚신과 삼태기와 멍석 등 짚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물건들을 만들어서 집안 살림살이를 마련했다. 그래서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어 자습이나 복습은 못하였지만 학교 성적은 항상 일·이등을 다투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나를 공부 잘하고 모든 집안 일을 솔선해서 잘하고 부지런하고 똑똑한 아이, 부모님 속을 썩히지 않는 효자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다음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