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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연재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9. 6. 15:14

제3회 “훌륭하신 할아버지와 잊을 수 없는 할머니 사랑”

 

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나의 할아버지 함자는 성(星)字 희(熙)字 셨는데,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1911년 출생)가 네 살 때이던 서른 여섯〔1914년(甲)〕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할아버님을 뵙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학공부를 많이 하셔서 한학에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계셨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가 읽으시던 한서와 직접 쓰신 시집들을 많이 보관하고 계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 멋 모르고 그 책을 뜯어 장판도 하고 벽지로도 쓰고 또 찢어서 제기를 만들어 차느라고 몇 년 사이에 남김 없이 다 없애버렸다. 철이 들고나서 할아버지 유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내용을 알 수 없음을 한탄했지만 이미 없어진 후라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할아버지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뵈올 길은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까지 사시는 동안 하신 일을 생각하면 할아버지를 훌륭한 분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께서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가난 속에서 아버지와 고모를 키우셨지만 할아버지의 정성어린 효심 덕택으로 손자들은 잘 살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사신 분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공주시 풍세면 조평리에 사실 때의 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우리에게는 고조할머니)의 산소를 쓰기 위하여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에 있는 산 속의 동굴 속에서 기거를 하시면서 산신령님께 ‘할머니 산소 자리를 점지해 달라’는 백일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백일동안 습기 가득한 동굴 속에서 밤잠을 안 주무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면서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린 끝에 백일의 마지막 날 밤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꿈속에서 신령님을 만났다.


신령님은 “네 정성이 지극하여 내가 너의 할머니 묏자리를 잡아 줄 터이니 따라 오너라!”고 현몽하시어 할아버지는 꿈 속에 그 신령님을 따라가 신령님이 가리키는 장소를 확인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단다. 할아버지는 그 꿈이 하도 신기하고 선명하여 신령님이 가리켜준 장소에 올라가 막대기로 표시를 해놓고 내려와 좋은 날을 정하여 할머니의 산소를 쓰셨다. 그런데 당시 공주시는 물론 인근 고을인 예산, 아산 등지에 사는 지관들이 소문을 듣고 산소 쓰는 날 찾아와 산소자리를 보더니 그 중에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심술궂은 지관 몇 사람들이 짜고 할아버지께서 표시해 놓으신 장소보다 3미터 위를 가리키며 이곳이 명당이라고 우긴 것이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할 수 없이 지관들이 가리키는 곳을 파게 하니 그 곳은 바위뿐 흙이 나오지 않자 어느새 그 곳을 파라고 우기던 지관들은 슬금슬금 도망가 버리고 뒤늦게 할아버지께서 지정하신 장소를 파보니 좋은 흙이 나와 명당자리인 줄 알고 할머니를 모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백일동안 제대로 식사도 못하시고 잠도 주무시지 못하여 할머니 산소를 모신 후 병을 얻어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할아버지 덕택으로 산소를 명당에 모셨으니 잘 살 것이라고 믿고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 살기가 어려워지자 점 보는 사람한테 찾아가서 알아보니 그 점쟁이의 말이 “할머니 산소를 명당에 모셨기는 하였으나 모실 때 3m 위를 파는 바람에 혈이 끊겨 그것이 이어지려면 삼대는 지나야 발복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지금은 고생을 하지만 너희들이나 너희 자식들은 그 혜택을 보아 잘 살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모신 산소가 위 산소 말고도 공주시 안에 고조할아버지 산소,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곳곳에 있는데, 일년에 한번씩 성묘를 가려면 옛날 자가용이 없을 때는 이틀이 꼬박 걸렸고, 요즘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아침 일찍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걸려야 그 곳 성묘를 모두 마칠 수 있다. 그만큼 산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고 길이 험하여 한번 성묘하고 오면 다리에 알이 밸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게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도 막상 산소에 올라가 성묘하고 보면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 눈으로 보아도 정말로 명당 같이 느껴지고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산소에 성묘를 하고 봉분 옆에 앉아 있노라면 내려오기가 싫어지고 그 곳에서 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성묘 갈 때 할아버지께서 백일기도를 드리셨다는 동굴을 들여다보고 자식들에게 설명하면서도 나는 단 하루도 혼자 이런 곳에서 잘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백일동안이나 이런 곳에서 견디셨을까 생각하니 한없이 할아버지가 위대해 보이고 그 정신이 장해 보였다.

학창시절 사진(오른쪽에서 두번째)

할아버지의 정성어린 기도 덕인지는 몰라도 할아버지 손자들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나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 검사생활을 하였고, 바로 밑의 동생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공학박사가 되어 동국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서 학장까지 역임하였고, 셋째는 서울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치과병원을 개원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넷째는 한양공대를 나와 한국전력 과장까지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병으로 요절하였고, 다섯째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개인사업을 하면서 잘 살고 있고, 여동생들도 남편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할아버지의 증손자들 역시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할아버지의 정성어린 효도 덕분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할머니께서 안 계셨으면 아마 어렸을 때 죽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그 당시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한글도 모르시는 무식한 분이셨지만 살아가는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아시고 그것을 지키는데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신 분이시다. 손자라면 끔찍이 생각하시고 특히 연약한 큰손자인 나에게는 특별한 애정과 정성을 쏟으셨다. 항상 부지런히 일을 하시어 돈을 준비하여 일년 내내 인삼을 다려 손자에게 먹여 건강을 유지하게 해 주셨고, 손자들을 위하여 추운 겨울 밤중에 성황당등을 찾아 다니시며 치성을 드리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서 빨리 성공해서 고생하시는 할머니께 잘해드리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살아 계신 동안 할머니께 잘 해 드린 일이 없다.


내가 서울법대에 합격했을 때, 또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제 우리 집안도 살게 됐구나!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기뻐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할머니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조기 새끼’한 마리 못 사다 드렸는데, 내가 검사된 지 3개월 만인 1967년 3월 5일(음력 1월 25일)에 여든 여섯을 일기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다행히 돌아가시기 전에 큰손자가 검사가 된 것을 기뻐하시고 자랑하셨지만 호강 한 번 못 시켜드리고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이 되고 가슴이 아프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