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과 일본어 배척 운동
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36년 강압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나는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해방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해방이 되던 날 밤, 요즈음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캠프파이어(Campfire)처럼 학교 운동장 한 복판에 장작불을 지펴 놓고 마을 어른들이 모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불 주위를 뛰면서 환호하는 광경을 보고 비로소 해방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이 물러간 후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36년간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강압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을 베웠다. 그 때부터 일본을 우리의 원수로 생각하고 일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일본사람을 “일본놈”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일본사람이 사용하는 ‘일어(日語)’도 우리 국민들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실수로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일본말을 하면 처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은 일본어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일본어를 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들은 몇 년 안 가서 3년 동안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던 일본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나와서야 그 때 일본어를 그렇게 서둘러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해 두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훨씬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위정자들이나 교육행정을 맡은 분들이 당장 현재만 보지 말고 더 먼 장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서둘러서 일본어 말살정책을 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따금씩 생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나라가 미군이나 영국 등 영어권 국가들과 적대관계에 있다면 영어를 쓰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 당시 국민들은 무조건 일본을 미워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장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더라면 당장의 여론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용기 있는 판단을 내릴 지도자가 그렇게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불가능이 없음을 알려주신 박보희 선생님
나는 비록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훌륭하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받을 수 있어 행운이었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6학년 담임이시던 박보희 선생님은 수려한 외모와 큰 키에 서양 귀공자 같이 잘 생기셨고, 음악, 미술, 체육, 연극, 웅변 등 못하는 것이 없으신 만능 선생님이셨다.
박보희 선생님은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을 숭상하였다. 박보희 선생님은 방 벽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 밑에 큰 먹글씨로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의 명언을 써 붙여놓고 항상 나폴레옹의 초상화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나폴레옹의 숭배자로 장차 자신도 나폴레옹같이 되는 꿈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셨다.
비록 학력은 사범학교가 아닌 지방에 있는 모 중학교 3학년 졸업이 전부였지만, 항상 정열과 열성으로 학생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박보희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랐다. 박보희 선생님은 항상 다른 선생님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셨다. 박보희 선생님의 교육 방법 중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밤 9시까지 학교에서 야간학습을 하는 등 중학입학시험 준비에 열중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니 선생님께서 반장인 나를 교무실로 불러 “오늘 6학년 2반 학생들은 운동장 아침 조회에 나가지 말고 전원 교실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같은 반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나가지 말고 교실에서 대기하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전달하고 교실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께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지금부터 모두 밖에 나가 나무 몽둥이 세 개씩 구해 가지고 들어오너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들은 모두 밖에 나가 학교 울타리 등지에서 아카시아 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를 세 개씩을 구해 가지고 교단 앞에 쌓아 놓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반장 앞으로 나와!”라고 하셔서 내가 앞으로 나갔더니 그 중 막대기 세 개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선생이니 그 몽둥이로 나를 때려라!”고 하시면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장딴지를 내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여학생들은 울음을 터트리며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 했으니 용서하세요.”라며 울부짖었고, 나는 “선생님, 저희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들어 잘못했으니 반장인 제가 대표로 맞겠습니다. 이 몽둥이로 저를 때리십시오.”라며 선생님에게 들고 있던 몽둥이를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좋아, 그러면 내가 때리지!”라고 말씀하시며 몽둥이를 받으시기에 나는 장딴지를 걷어 올리며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순간 몽둥이로 때리는 소리는 들렸으나 아프지 아니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눈을 뜨고 보니 선생님께서 몽둥이로 선생님 자신의 장딴지를 수 없이 때리고 나서 몽둥이를 왼손 오른손 바꿔 쥐고 자신의 양팔을 걷고 가시 돋친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려서 선생님의 양다리와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등 참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순간 학생들이 앞으로 뛰어나와 선생님이 들고 계신 몽둥이를 겨우 빼앗아 사건이 겨우 끝난 일이 있다.
박보희 선생님은 그 당시 학생들이 입학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고 나태해지자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시기 위하여 그러한 충격 요법을 쓰셨다고 한다. 이처럼 박보희 선생님은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기관차와도 같은 분이셨다.
박보희 선생님은 졸업식날, 나에게 졸업장을 쥐어주시면서 “문우야! 너는 인생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거라. 그러면 꼭 성공할 거다.”라고 격려해 주셨고, 나는 살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선생님의 그때 그 말씀을 되새기며 용기를 얻곤 하였다.
박보희 선생님은 내가 졸업한 후 교직생활을 그만 두시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셨다가 몇 달 후 6.25 사변으로 현지 임관하여 참전 중 육군 대위 때 미국에 견학 차 갔다가 자신이 영어를 보고도 뜻을 알지 못하는 장님,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 말을 할 줄 모르는 벙어리 등 세가지 병신임을 뼈지리게 깨닫고 “앞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귀국하시어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동급생 40명 중 자기만 중학교 3년 졸업의 학력으로 영어를 모르고, 나머지 서른 아홉명의 학생은 모두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통역장교로 영어를 잘 하는 학생들이었다. 박보희 선생님은 “내가 저 사람들과 경쟁하여 이기려면 저 사람들이 놀 때 놀고 잠을 잘 때 같이 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으니 저 사람들이 놀고 잠잘 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첫날부터 그 날 배운 것을 백번씩 읽어 완전히 외우지 않으면 잠을 안 잔다는 소위 백독주의(白讀主義)를 실천에 옮겨 매일 배운 것을 모두 암기하였다.
그것도 며칠이지 계속 잠을 안 자고 배운 것을 백번씩 읽다보니 잠이 쏟아져서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거나 겨울에 냉수에 발을 담그고 책을 읽는 등 부단한 노력과 인내심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할 때는 영어를 전혀 몰랐으나 졸업할 때에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졸업 후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자기의 목표인 ‘세계에서 제일 영어 잘 하는 외국인’이 되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계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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