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인사이드

제 7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0. 7. 16:07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의 추억Ⅱ

 

⃟ 법조인의 꿈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장차 커서 훌륭한 판사나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온 후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약한 사람을 돕는 판사나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고, 못 쓰는 종이나 땅바닥에 ‘국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이란 낙서를 수없이 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다른 반 유종호라는 학생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나와 나이는 같았으나 제 나이에 학교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오학년 때 해방되어 일본어를 곧 잘 하였다. 그와 대화 중에 내가 장차 훌륭한 법조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더니 그는 “너 일본의 유명한 민법학자 ‘아처영(我妻榮/와가츠마 사카에)’이 쓴 민법총론을 아느냐, 또 일본 형법학파 중에 객관주의 학파와 주관주의 학파가 있는데 누가 객관주의 학파이고, 누가 주관주의 학파인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 어느 누구로부터도 그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몹시 당황하였다.

 그 무렵 나는 늘 수석을 차지하여 누구보다도 공부에 관한 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의 질문을 받고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기에 법학이론이나 교수들의 이름까지 외울 수 있단 말인지 그가 두렵고 몹시 커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에게 자극을 받아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교과서 이외의 책을 빌려다가 열심히 읽었다.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중학교에서 받은 장학금 십만원을 가지고 이병도의 『국사대관(國史大觀』을 4만원에 사고, 유진오의 『헌법학개론』과 황동준의 『행정법총론』을 사서 열심히 읽어 보았지만 도무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어 내 머리가 나쁜 것 아닌가 하고 비관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실제로 서울법대에 합격하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법학서적을 사서 뜻도 모르고 읽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친구 유종호에게서 자극을 받아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하여 고등학교 때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덕택으로 서울법대와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유종호 동문을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은인으로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 내 인생의 두 번째 기적

 아버지는 편모 슬하의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학교 공부와 한문 공부를 못하셨기에 글은 알지 못하셨다. 하지만 머리가 좋으셔서 도고면에서는 숫자를 계산할 때 주판을 사용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암기력이 더 빨라 면내에서는 암기왕으로 명성을 떨치셨다.

 아버지는 작은 논을 가지고 논농사를 지으면서도 우마차를 가지고 산에서 벌채목을 운반하는 운송업에 종사하시며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7남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밤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열심히 일하시던 마음씨 착한 분이셨다. 흠이라면 술을 좋아하셔서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돌아오시는 바람에 간이 약해지셔서 급기야는 1년 간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1952년 2월 14일 추운 겨울날 밤 마흔 둘의 젊으신 나이에 일흔 셋의 할머니와 마흔의 어머니 그리고 나이 어린 일곱 남매를 남겨둔 채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장남인 나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고, 막내 여동생은 만 2세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 때 가족들의 슬픔과 절망감은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아버지의 상여가 나갈 때, 어린 동생들과 같이 상여 뒤꽁무니에 매달려 한 없이 울던 장면을 떠올리면 자금도 눈물이 나곤 한다. 그 때 우리 형제들의 우는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도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에 모두 울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갑자기 집안의 기둥이 되어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동생 여섯명을 책임져야 할 짐을 지게 되었다. 당시 집안 형편으로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 3학년 겨울방학 중이라 방학이 끝나고 졸업시험만 보면 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는 동생들을 위하여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하여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고등고시 시험 준비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전교 1등을 해 왔기 때문에 졸업 시험을 보지 않아도 학교에서 졸업장을 줄 것을 믿고 개학을 하고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밑의 동생 선우가 예산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는데, 동생이 개학을 해서 학교에 갔다 오더니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임동권 선생님께서 동생 편에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는, “이번에 학교에서 남군의 자질을 아껴서 졸업 시험에 전교 일등을 하면 고등학교 입학금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매월 십 만원씩 장학금을 주기로 의결하고 교비생 한 명을 뽑기로 되어 있으니 빨리 학교에 나와 시험준비를 해서 졸업시험을 보아라” 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나를 위해서 교비생 제도를 만들었다니 너무 고맙고 기뻐서 그 날로 예산에 가서 졸업시험 준비를 하여 시험을 보게 되었다.

 이후 나는 교비생에 선정되어 중학교에서 내 준 입학금으로 그 해 4월 26일 예산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매월 받은 십 만원의 장학금으로 동생 두 명(둘째, 셋째)과 함께 세 명이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특대생이 된 나는 고등학교 수업료를 전액 면제받게 되었다. 나부터 시작된 교비생 제도는 매년 실시한다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나 한 사람으로 끝나고, 그 다음 해부터 없어져 버렸다. 나는 은사님들의 도움 덕택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 두 번째 ‘기적’으로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내가 교비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갑자기 아버님을 잃고, 학교 공부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정을 아시는 임동권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신 김하구 선생님께서 적극 주선하셔서 이의필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고, 전 교직원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임동권 선생님과 돌아가신 김하구 교감 선생님, 이의필 교장 선생님을 은인으로 모시고 항상 그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