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 결혼Ⅰ
나는 1952년 11월 26일(음력 10월 29일) 당시 고등학교 2학년, 만 18세(실제로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지금의 처(장주정)와 결혼하였다. 당시 내가 장가간다니까 동급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 대부분이 “왜 공부도 잘 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 벌써 결혼을 하느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놀라워하였다. 선생님들 중 유독 미술 선생님이신 성주홍 선생님께서만 “장가를 일찍 가서 자식 일찍 낳아 기르는 것도 나쁠 것 없다”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내가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을 뿌리치고 일찍 장가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가 안 되고 또 아내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당시 집안 형편상 안살림을 할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장남인 내가 희생적으로 일찍 장가가기로 결심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어머니는 몸이 약하셔서 자주 아파 몸져 누우셨다.
어머니는 며칠씩 못 일어나시는 날이 많아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 부엌에 나가 아침밥을 지어 자식과 손자들을 먹이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밝지 못하고 늘 썰렁하여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께서 어서 건강하시고 마음을 너그럽게 쓰셔서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는 명랑한 가정 분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몫까지 신경을 쓰시다 보니 몸과 마음이 더욱 약해져서 누워 앓으시는 날이 많아지고 일흔을 넘긴 할머니께서 부엌에 드나드는 날이 많아졌는데, 할머니께서도 천식으로 겨울철이 되면 기침 때문에 고생 하면서 어렵게 부엌살림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기가 너무 딱했고 괴로웠다. 그러던 중 한 마을에 사는 집안 아주머니(처의 이모)로부터 “참한 색시가 있는데 네가 장가가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것이 어떠냐?”는 말씀을 듣고 며칠 밤을 지새며 고민을 하다가 장가가면 공부하는데 지장은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하기에 따라 극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장남이니 일찍 장가가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도와 드리는 것이 도리이고, 새 사람이 들어와 집안 분위기를 밝게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아주머니에게 “장가 가겠으니 소개해 달라”하여 그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그 분의 이질녀인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아주머니가 이질녀를 소개할 때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여 집안에서 큰일을 도맡아 하는 아이이니 아마 너의 집에 꼭 맞는 훌륭한 맏며느리가 될 것이다”고 하시며 선도 볼 필요 없다는 것을 그래도 우겨 온양온천에 있는 자장면 집에서 맞선을 보았다.
우리는 처음 만나자마자 천생연분이었는지 서로 한눈에 마음에 들었고, 첫눈에도 어두운 구석은 하나도 없고 밝고 깨끗한 얼굴에다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판단되어 속으로 ‘저런 색시가 우리집에 오면 그 동안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지고 밝고 명랑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겠구나’하며 좋아했다. 함께 자장면 집에서 나와 헤어진 후 지나가는 트럭 적재함에 타고 (당시에는 버스가 없어 트럭 적재함에 타고 다녔음) 집에 돌아오던 중 그 처녀는 근처에 있는 외갓집으로 갔는데, 걸어가다가 나를 보고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그 예쁘고 명랑한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드디어 양가 어른들과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장가갈 돈이 없어 걱정이었다. 그 당시 장가가려면 요새 같이 예식장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신부집 앞마당에서 초례청을 차려 놓고 예식을 올리던 때라 예식장 비용은 필요 없었으나 적어도 신랑이 입을 바지저고리, 마고자, 두루마기 등 옷과 구두를 새로 사 신어야 하고 서로 교환할 예물도 장만해야만 했다.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가장 값싼 인조원단을 사다가 집에서 바지저고리 한 벌만 달랑 해 입고 구두는 신던 군화를 그대로 신고 신부에게 줄 예물도 준비 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지나가는 트럭을 타고 장가를 갔다. 그 당시 처갓집 마을은 옛날 정감록 비결에 피난지로 나왔다는 공주군 유구면 문금리(검단리)로서 꽤 큰 마을이었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면 큰 길에서 약 4km나 개울을 옆에 끼고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아주 깊은 산골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내 또래의 청년이 수 십 명이나 되는데도 중·고등학생이 한 명도 없는 마을이라 고등학교 학생이 장가 온다니까 온 마을이 떠들썩하고 나의 가정형편 등 내막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개 딸 시집 잘 간다”고 부러워하였다고도 한다.
그 당시 장가갈 때는 집안 어른을 ‘후행’으로 신부집에 모시고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나는 삼촌은 물론 당숙도 안계셔서 집안 어른 중에 ‘후행’으로 따라 가실 분이 없어 내가 존경하던 윤규상 선생님께 부탁하여 윤규상 선생님께서 후행으로 따라가 주셨다. 또 친구들 중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임동환, 박인선, 박승희, 이철웅 군이 내 들러리를 해 주었다.
저녁이 되어 신방을 차려놓고 들어가라고 하여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을 가지고 신방에 들어가 앉아 신부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는데 신부의 거동이 이상하여 숙이고 있는 신부의 얼굴을 들고 들여다보니 예쁜 신부가 아니고 친구인 박인선이 나를 놀려 주려고 여자 옷을 입고 신부행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친구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려 방바닥에 메치며 “야, 빨리 나가라”고 소리 지르자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다른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하던 장면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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