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아, 이종건 교장 선생님(세 번째 기적)Ⅰ
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산중학교와 예산농업고등학교의 특대생 제도와 예산중학교의 교비생제도 덕분으로 무사히 고등학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더 큰 문제는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느냐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대학에 진학하면 병영연기 특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너나없이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농업고등학교였지만 농업과목은 소홀히 하고 주로 대학입학 시험 준비에 주력하였고, 나도 그 덕분에 대학입학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고 다짐하였기 때문에 만약 대학을 간다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연습장이나 맨땅 위에 ‘국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합격’이라는 낙서를 수없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우리 집안 형편상 누구의 도움없이 대학을 진학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고민하던 중 1955년 1월 무렵 국립 체신대학 행정과 학생을 국비생으로 특차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를 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행정과에 들어가면 법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체신대학 입학원서를 써가지고 상경했다. 체신대학 입학원서를 가지고 서울에 갈 때 실제로 갈 수는 없지만 평소 꿈이었던 서울법대 입학시험이라도 한 번 치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법대 입학원서도 함께 써가지고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가 당시 피난차 예산농고에 내려와 계시다가 서울 소재 대학교수로 영전하신 은사님(故 김하구 교수님과 임동권 교수님)집에 염치없이 기거하면서 특차인 체신대학 입학시험을 보고 나서 서울법대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체신대학에 합격은 되었으나 국비생으로 모든 것이 무료라던 신문 공고와는 달리 입학금이 무려 6만원이나 되었고, 입학금 납부 날짜도 서울법대 합격자 발표날짜보다 빨랐다. 나는 다시 절망감에 빠져 고민하던 중 서울법대 시험을 보고 나서 우연히 서울법대 정문 앞에서 서울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유일한 고교 선배인 김진우 선배(헌법재판관 역임하고 변호사로 계심)를 만나 체신대학과 서울법대 시험 본 이야기를 하였다. 그 선배는 “왜 체신대학에 가려고 하나, 서울법대만 합격하면 얼마든지 고학할 길이 열리니 서울법대만 합격하라”고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격려를 해주어 섬광처럼 새로운 길이 환희 보이는 듯했다.
선배의 말을 듣고 그런 줄 알았으면 서울법대 시험을 좀 더 열심히 잘 볼 걸 하고 후회하면서도 혹시 서울법대에 불합격되면 체신대학에라도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체신대학 학장실로 찾아가 “국비생 모집한다고 해서 시험을 보아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6만원씩이나 내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 했더니 학장이 나를 가상하게 생각했던지 입학성적표를 확인하더니 “학생은 3등으로 합격한 걸 보니 공부 잘했군, 학교에서 입학금 면제는 안 되고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이니 언제까지 낼 수 있나”하고 물어서 나는 “시골에 내려가 땅을 팔아야 되니 두 달만 주십시오”하고 요청했다.
학장의 승낙을 받고 나와 서울법대에 합격하기만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서울법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학금도 체신대학의 절반도 안되는 이만 오천원 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입학금이 마련된다면 서울법대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이만 오천 원의 입학금을 어떻게 마련하여 등록마감일 까지 납부할까 전혀 앞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하였다.
선배들은 그렇게 들어가려 해도 못 들어간 대학을 혼자 응시하여 붙은 자랑스런 합격이었는데! 남들은 너도나도 대학을 간다는데 명색이 중·고등학교 6년 전체 수석을 하고도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입학을 포기하게 만드는 세상! 이런 저런 생각을 할수록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패배감과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어머니는 아들이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 합격하였으니 땅이라도 팔아서 가라고 하시는 것을 일곱 남매의 장남으로 겨우 가족들의 식량줄인 논을 팔아 대학에 갈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님께 “도와주는 분이 계셔서 입학금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심란하여 집에 있을 수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입학금 납부 마감 이틀 전에 자포자기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혼자 흐느껴 울면서도 앞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동생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목표인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가 문득 서울법대에 합격하여 인사차 교장실에 들렸을 때 교장 선생님께서 “입학금은 어떻게 준비되었느냐”고 걱정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께 하소연이라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생각 끝에 이종건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편지 내용인즉, “교장 선생님, 선생님께서 걱정하신대로 내일 모레가 입학금 등록마감인데 아직 준비를 못하여 입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꼭 성공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는 요지의 편지를 써서(쓰면서 눈물이 흘러 눈물자국이 편지 내용을 흐리게 한 것 같다) 같은 학교 2학년 학생이던 동생 선우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가지고 예산에 가서 교장 선생님께 드리고 내일 아침 서울 가는 기차 편으로 와라. 나는 도고온천역에 나가 서울 갈 차표를 사가지고 플랫폼에서 기다릴 것이니 만일 빈손으로 오면 그대로 내리고 돈을 주시면 나에게 차에 타라고 말하라”고 이르고 동생을 예산으로 보냈다. 당시 장항선은 예산, 신례원, 도고를 거처 서울로 가는 노선이었다.
나는 동생을 예산으로 보낸 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어머님께 “돈이 준비되어 서울로 등록금 내러간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아침 기차시간에 맞춰 도고역에 가서 기차표를 사 가지고 플랫폼에 나가 서울행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휴먼인사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12.01 |
---|---|
제12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1) | 2022.12.01 |
제10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11.01 |
제9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0) | 2022.11.01 |
제8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1) | 2022.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