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제 12회 아, 이종건 교장 선생님(세 번째 기적)Ⅱ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핸드폰은 고사하고 전화도 없는 세상, 서울 가는 교통수단도 버스나 승용차는 상상도 못하고 오직 하루 한 번 운행하는 기차뿐이었다. 더욱이 입학 시즌이라 서울 가는 사람이 많아 출입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 위까지 매달려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기차의 시커먼 몸체가 신례원 쪽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도고온천역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도고온천역 이전 전). 내 동생은 그 기차에 타고 있을 것이고, 돈을 가지고 오느냐 빈손으로 오느냐, 대학에 등록할 수 있느냐, 대학을 포기하느냐의 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건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초조한 마음으로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만약 뜻대로 안 되더라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알차게 살리라 다짐하면서 몇 분을 기다리던 중 기차가 역에 멎자 동생이 승강구 밖으로 꽉 찬 승객들을 비집고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형 빨리 타요”라는 외침과 동시에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들고 많은 승객 틈을 비집고 기차에 올라타면서 “이제 됐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봉투를 확인해보니 분명 만원짜리 세뭉치 삼만원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그렇지 않아도 남군이 입학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남군의 편지를 받고 야간에 학교 운영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남군의 등록금을 도와 주기로 결의하여 적은 돈이지만 삼만원을 동생 편에 보내니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기 바라네. 학교 형편상 더 이상은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앞으로 고학을 해서라도 꼭 학교를 마치고 성공하게.”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하도 감격하고 고마워서 옆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이제 여든을 넘게 살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그 때처럼 감격스런 순간은 없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서울에 올라가 그 다음날(등록마감일) 당당히 등록금을 내고 서울법대생이 되었으니, 만일 그 때 선생님의 기적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등록금 마감 일자를 넘겨 서울법대를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 당부대로 가정교사, 신문배달, 외판원, 책장사, 막노동 등을 하면서 고학으로 서울법대를 졸업하였다.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선생님의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일곱 남매와 어려운 세상을 살다보니 선생님의 크나큰 은혜에 만분의 일도 보답을 못하였다. 겨우 일 년에 한 두 번 찾아 뵙거나 중학교 후배들에게 장학금 몇 푼 쥐어 준 것이 고작이었다.
2004년 6월 18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선생님의 영전에 그 동안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과 선생님을 잃은 슬픔으로 한없이 울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전화나 편지로 못난 제자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면서 항상 격려해 주시고 옳은 길로 인도해 주셨는데 선생님께서 영원히 가셨으니 이제 누구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갈까. 아직도 갚지 못한 스승님의 은혜를 어찌 해야할까. 이제 선생님은 떠나시고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한없는 후회와 그리움만 남아있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생활Ⅰ
나는 이종건 교장 선생님의 극적인 도움으로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하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입학하자마자 너무 다른 환경에 놀라고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예산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집은 가난했지만 어느 부잣집 아들 부럽지 않게 자긍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공부를 했으나, 서울법대에 입학하고 동급생 300명 속에서 어울리다 보니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동급생 중에는 서울의 명문고등학교를 비롯해서 경북, 대구, 부산, 경남, 광주, 전주, 대전 등지에서 십여 명씩 합격하여 자기들끼리 떼지어 몰려다니는데 나만 혼자 외톨이로 합격하여 누구 하나 말 상대 해주는 학생이 없었다. 또한 모두들 그 해부터 새로 생긴 멋진 교복을 입고 법률 서적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나만 교복대신 군복을 염색한 작업복을 입고 노트만을 들고 학교 강의를 들으러 다녔으니 내가 보아도 내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서울의 자기 집에서 다니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하숙을 하면서 먹고 자는 걱정 없이 공부만 하는데, 나는 당장 먹고 잘 곳이 없어 걱정이었다.
나는 우선 예산중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시고 미아리에 사시는 김하구 선생님 댁에 기거하는 동안 버스비가 없어서 미아리에서 당시 종로5가에 있던 대학까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예산농업고등학교에 계시다가 경복고등학교로 전근 오신 김헌직 선생님의 도움으로 경복고등학교 1학년 학생 박 모군의 가정교사가 되어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박군의 집에 들어가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 몇 달간은 열심히 가르친 덕에 학생 성적이 조금 올라가는 듯하여 학생 부모님들도 좋아하였으나 일정 수준에서 더 올라가지는 아니하였다. 가르칠 때는 알아듣는 듯 했으나, 하룻밤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진전이 없었다. 예를 들면 내일이 수학시험이라 그 동안 가르친 문제 중에서 시험에 나올 법한 예상문제를 내어 풀게 하면 내 앞에서는 100% 문제를 풀어서 안심하고 시험을 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생이 시험을 보고 와서 “선생님이 찍어준 예상문제가 많이 나와 자신 있게 문제를 풀었습니다.”라고 하여 같이 기뻐하고 나도 좋은 점수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나중에 점수를 받아오면 번번이 내 예상을 빗나가 나를 실망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학생에게 나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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