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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2. 1. 11:33

제 14회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생활Ⅲ

나는 1956년 6월경 동생들을 후암동에 있게 하고 충정로에 사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3학년 학생 권모 군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학생은 아버지가 어떤 도의 교육감으로 근무하고 여러 명의 누님 밑에서 귀엽게 자란 외동아들이었다. 부모님들은 지방에 살고 있고 서울 충정로에서 공장을 하는 삼촌 집에서 기거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부모님들은 서울대학은 안 되더라도 적어도 연대나 고대에 입학할 수 있기를 희망하여 가정교사를 붙여 주었기 때문에 학생은 일류 대학에 입학해야 된다는 중압감 속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나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학생의 능력은 한계가 있어 가정교사한테 과외 공부를 한다 해도 당장 몇 달 사이에 성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봐도 고대나 연대는 어림도 없는 실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은 시험날짜가 다가올수록 부담을 느끼고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그 때 가서 네 실력에 맞는 대학을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 보았지만 그 학생은 1956년 12월 어느 날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가고 말았다.

 

 학생의 가출로 지방에 있던 그 학생의 부모는 물론 충정로 삼촌 집까지 발칵 뒤집혀 그 학생이 갈만한 곳을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이 상의한 끝에 전단을 만들어 서울시내 전역에 뿌리고 신문 광고를 내어 찾았으나 행방은 묘연하였다. 학생의 행방을 찾느라 정신이 없던 중, 설상가상으로 지방에 살고 있는 그 학생의 할아버지가 학생이 가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작고 했다는 연락이 왔다. 온 식구가 학생을 찾는 일을 미루고 모두 지방으로 내려갈 때 나도 따라 내려갔다. 물론 학생이 가출한 것은 내 책임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잘못으로 학생이 가출한 것 같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가족들이 뭐라고 할까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가족들이 워낙 점잖은 분들이라 나에게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다. 

 

5일장으로 치르는 할아버지 장례 하루 전 그 학생이 지방에 있는 집에 나타났다. 온 가족이 상 중인데도 여러 날 소식이 없던 외아들이 돌아오자 가족들은 반가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나도 반가워서 어디 가서 지내다 왔느냐고 물었더니 제주도에 가서 있다가 신문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보고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돌아와 할아버지 장례도 무사히 치르고 서울에 올라와 학생을 달래 학교에 보냈는데 학교에 갔다 오더니 난리를 피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학생이 학교에 갔다오다가 집 근처 전주에 붙어있는 자기를 찾는 광고문을 본 것이었다. 학생은 “왜 그 따위 광고를 냈느냐? 창피해서 학교에 못 다니겠다”면서 가족들에게 항의하면서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가족 중에 누가 가출해도 함부로 사람 찾는 광고를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결국 그 학생은 그 해 대학 입학 시험을 포기하였고, 몇 년 후에 그는 대학을 나와 어떤 직장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다시 동생들과 같이 마포구 공덕동에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화신 옆에 있는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한글대사전』을 들고 돌아 다니며 판매를 하거나 새학기를 맞이하여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각 학교에 공급할 때, 밤을 새워 가면서 책을 차에 싣는 노동을 하여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하여 학교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 일학기 때인 1957년 6월 5일에 학도병 징집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전방 부대에 배치되어 1년 6개월의 단기 복무를 마치고 1958년 12월 말에 귀향하여 (1959년 5월 20일에 정식 제대) 다시 지긋지긋한 가정교사 생활과 구두 외판원 등을 하면서 1959년 4월 1일 대학에 복학하여 공부하다가 1959년 10월경에 고등고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낙향하여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군대생활에서 약해진 위가 망가져 위장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투병 생활을 하느라고 고시공부도 포기하고 겨우 학교 학점만 취득하여 1961년 3월 28일 입학한지 6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여러 사건과 고비를 겪으며 지나갔는데, 이 외에 대학생활 동안 겪었던 일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몇 가지 일화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가짜 대학생 이야기다. 나는 입학하자마자 충남에서 올라온 학생 십여 명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나의 고향 인근 군에서 왔다는 한 학생과 더욱 가까이 지냈다. 그 학생의 이름과 고향은 알지만 밝히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밝히지 않는다.

 

 그 학생은 새로 생긴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윗옷에 서울법대 배지를 달고 법률 서적을 들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듣는 열성적인 학생이었고,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으로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학생들을 지도한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 강의 시간이 끝나면 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와 나는 만나면 고향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교회 이야기, 장래희망 등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1년을 마치고 2학년 초기에 그가 보이지 않아 궁금하던 차에 경상도 출신의 한 학생이 나에게 “야, 문우야! 너랑 친하게 지내던 친구 있잖아. 그 사람 가짜 학생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가짜 학생이라니 말도 안돼.”라고 하자 그는 “그러면 학생과에 가서 입학생 명부를 보고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경상도 학생과 같이 학생과에 가서 입학생 명부를 달라고 하여 몇 번이고 그 학생의 이름을 찾았으나 그 학생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항간에 가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내가 바로 그 가짜 학생과 같이 공부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고 또한 배신감에 화가 났다. 

 

그렇게 착하게 보이던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신앙심이 돈독한 그가 무엇 때문에 가짜 학생 노릇을 했을지 궁금했다. 또 가짜 학생 노릇을 하면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내 마음도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했을까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자기도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자라 국가에서 학비를 부담하는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학교의 권유로 서울법대 입학시험을 봐 합격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는 아마도 고등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불합격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다가 막상 불합격되고 보니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남에게 불합격됐다는 말을 차마 못했을 것이고, 더욱이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드리기 두려워 1년 후에 합격하면 1년 간 거짓말 한 것을 치유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어머니와 주위 사람에게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1년간 학교에 다니면서 가짜 학생 노릇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그가 어머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불합격된 것을 알리고 1년 간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서울법대에 합격하는 길을 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를 가짜 학생으로 안 후 그를 만났더라면 1년간 사귄 친구의 우정으로 올바른 충고를 했을 텐데 그는 2학년이 된 후 영영 학교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였다. 아무쪼록 그가 어디에선가 가짜가 아닌 진짜 인생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나는 입학하자마자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법대 동기생이 된 한백 군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당시 후암동에 있는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집이 어찌나 크고 호화스러운지 판잣집에 세 들어 사는 나로서는 그 집에 가려면 항상 기가 죽었으나 친구가 좋아 자주 드나들며 친하게 지냈다. 나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1953년에 결혼하여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큰딸을 낳은 애 아버지였으나 대학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는 내가 결혼한 애 아버지라는 것을 알릴 기회가 없어서 동기생들은 모두 내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 군과 사귄 지 일년이 지난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다음 일요일날 시간 낼 수 있느냐?”고 물어서 나는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한군은 “내 이종여동생이 있는데 얼굴도 예쁘고 착실하여 너에게 소개 하려고 이미 이모부 내외와 이종 여동생에게 네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다음 일요일에 그 집에 놀러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고마운 친구에게 더 큰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야, 나 결혼했어!”라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야, 농담하지 마!”하고 재차 물어서 “나는 3년 전에 결혼하여 이미 딸이 있는 아버지다”라고 정색을 하면서 말했더니,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손으로 나의 뺨을 때리며 “야 임마, 왜 결혼했다고 진작 말하지 않았냐?”하고 화를 내었으나, 나는 “야, 일찍 결혼한 것이 뭐 자랑할 것이냐, 네가 물어봤으면 대답했을 것 아니냐”고 대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 친구가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를 그렇게까지 믿어주었다는 점에 감동을 받고 진심으로 고마워 하였다.

 

 그런 후로 나는 그 예쁘다는 한백군의 이종 여동생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우정은 변치 아니하여 사회에 나와서도 친하게 지냈다. 그 역시 남보다 빠르게 고급공무원으로 승승장구하다가 고혈압으로 오십대의 이른 나이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그 티없이 밝은 웃음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던 한백군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