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인사이드

제15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2. 1. 11:35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생활Ⅳ

 앞에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생활이라고 했지만, 고학의 어려움 속에서도 낭만의 순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밤잠을 못 자면서 밤새워 막노동을 하면서도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던 때도 있었다. 중·고등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할 무렵 종로2가에 있는 검인정교과서주식회사에서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교과서를 배급하는데 나는 밤새워 무거운 책뭉치를 트럭에 싣는 작업을 하였다. 한참 일을 하다가 새벽 한 시경 쉬는 시간이 되면 그 앞 큰 도로 옆에 줄지어 있는 동동주 집에 가서 찹쌀이 동동 떠 있는 찹쌀 동동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일에 지쳐 몸이 축 늘어지다가도 그 달콤하고 씁쓸한 찹쌀 동동주를 서너잔 마시면 알코올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서 피로가 싹 가시고 기분이 붕 떠 흥얼거리면서 밤을 새워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일꾼들끼리 동동주 잔을 부딪치면서 걸걸하게 주고 받는 대화는 잘난 체하는 대학생들의 고담준론보다 훨씬 재미있고 정감이 가곤 하였다. 그 때 동동주 마시면서 떠들어대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다시만나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잔이라도 부딪치고 싶다.

 또 하나, 아직까지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추억이 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여 잠시 가정교사로 있을 때, 남자 막내 동생 형우가 시골에서 상경하여 다른 동생들과 마포구 공덕동에서 자취를 하며 균명중학교 야간부에 다니고 있었다. 형우는 다른 동생들보다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내가 가정교사로 있는 집을 자주 찾아오곤 하였다. 동생은 형이 보고 싶어서 찾아오겠지만 나는 괴로웠다.

 당시 어렵게 고학을 하고 있을 때라 먹거리도 시원치 아니하여 동생을 불러들여 따뜻한 밥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진 돈도 없어 용돈도 못 주고 대문 밖에서 잠깐 만나고 냉정하게 가라고 소리 질러 돌려보낼 때의 내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형이 돼 가지고 자기는 따뜻한 밥 먹고 편히 살면서 어쩌다 찾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하고 대문 밖에서 그대로 되돌려 보냈으니 얼마나 못된 형이었는가. 나는 지금도 그때 동생이 찾아왔다가 힘없이 되돌아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동생에게 미안하고 내 가슴이 아리고 슬펐고, 내 자신이 미웠다. 동생은 아마도 그 때의 일을 잊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다행히 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고 살고 있어 마음 든든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고마운 것은 형이 공무원의 박봉으로 5남매를 키우는 것을 옆에서 보고 조카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나 등록을 할 때, 결혼을 할 때, 몫돈을 내 놓아 형을 도와주고 있다. 제발 내 자식들이 삼촌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기 바랄 뿐이다.

 지금 다시 대학생활을 돌이켜 봐도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일 없는, 내 인생에서 대학생활 6년의 세월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암흑기였다.

군대생활의 추억Ⅰ

 나는 대학 3학년 1학기 때인 1957년 6월 5일에 학도병 현역 입영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군인생활을 하였다. 군번은 0005288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은 현역군인 입대를 연기 받아 왔으나 학생들을 군에 입대시켜 1년 6개월의 단기 복무를 마치고 제대시키는 학도병 제도가 생겨 내가 제1기로 징집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학도병 1기로 징집된 학생은 나의 법대 동급생 중에도 사십여 명이 징집되어 혼자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고학으로 공부하는 동생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나 없어도 동생들이 잘 견뎌 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군대에 갈 수 있었다. 훈련소에 들어가 보니 그 동안 옷으로 치장되어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본성이 옷을 모두 벗기자 각 개인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인간의 본색이 그대로 드러나듯, 그 동안 학교에서 고귀하게만 보이던 법대동기생들이 거의 다 차지하다 보니 그 본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려운 환경일수록 서로 힘을 합쳐 협동심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거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기 개인만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짓밟는 이기주의의 극치만을 볼 수 있어서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그 때 ‘앞으로 절대로 법과대학을 나온 사람을 사위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처자가 있는 고향집에 내려가지 못하고 논산훈련소에 가서 편지와 옷 보따리만을 고향집에 보내 군대에 입대한 사실을 알렸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 받으면서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 주말마다 허용되는 가족들의 면회였다. 훈련병들은 1주일 내내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주말에 있을 가족들의 면회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참다가 주말에 가족들과 만나 가족들이 준비해 온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피로를 풀곤 했다.

 하지만 훈련기간 내내 나에게는 가족들의 면회가 없었다. 아마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못 오시고 아내는 오고 싶어도 어른들의 승낙이 없어 오지 못하고 동생들은 어려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으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또 매주 빼놓지 않고 면회 오는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논산훈련소에서 몇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그 해 시월 경에 군인트럭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시골길을 밤새도록 달려가 어느 부대에 배속되었는데, 강원도 양주에 있는 육군보병 12사단 37연대 산하중대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명으로 “학도병들은 행정병으로 배속할 수 없고, 말단 소총 소대원으로 배치하라”는 지시공문이 따라붙어 학도병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원 최전방부대 소총수로 배속되었다. 나는 부대에 배속 받고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내가 소속된 중대원들은 중대장과 육사출신 소대장 한 두 명을 빼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단 한명만 있어 중대 본부 서무계 일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