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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2. 20. 15:24
군대 생활의 추억Ⅲ

 

 

 내가 중대에 배속된 지 사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근처 개천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선임하사가 빨리 오라고 하여 선임하사실로 들어 갔더니 새 것이나 다름없는 군복과 워커군화와 모자를 내주면서 빨리 옷을 갈아입고 연대장실로 가 보라고 하여 급히 옷을 갈아입고 연대장실로 뛰어가 연대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연대장실 의자에 앉아 있던 별 한 개를 단 모자를 쓴 군인이 문 쪽으로 뛰어나오면서 “남 선생 고생 많으십니다.”고 말하면서 내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나는 별을 보고 놀라 한참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대학 1학년 때 가정교사로 있던 학생의 아버지 박 모 장군이 아닌가. 박 장군은 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칠 때는 논산훈련소 부소장으로 있었는데 내가 연대장실에서 뵐 때는 내가 속한 12사단의 상급부대인 제3군단 부군단장으로 있었다. 그 분은 내가 12사단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나를 만나러 아침 일찍 연대장실에 오셔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박 장군이 나를 자기 옆 의자에 앉게 하고 대령이던 연대장에게 “연대장! 남선생은 무엇이든지 잘 하는 분이니 밑에 두고 시켜보시오.”라고 하자 연대장은 즉시 인사참모를 불러 “남 일병을 데리고 나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해주라.”고 지시하여 나는 박 장군과 연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와 인사참모의 배려로 그 날부터 연대 인사과에서 직무대리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박 장군 덕택으로 상급 부대에서 감사 나올 때 잠깐 원대 복귀하여 감사를 마칠 때까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할 때까지 37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박 장군은 내가 알기로는 상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분의 아들로서 애국자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덕장으로 육군준장까지 승진하였으나 자유당 정권 때, 소위 이범석 계열(족청)로 인정되어 더 이상 승진을 못하고 예편하여 광복회 회장을 역임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내가 연대 인사과에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많지만 그 중 두어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제대하기 몇 달 전에 실시한 CPX때 야외 훈련을 받은 일이다. 아마도 1958년 8월 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37연대는 양구에 있었는데, 양구에서 춘천을 거쳐 가평까지 행군하여 야외 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인사과 직원이 약 이십여명 되었는데 출발하기 직전 연병장에 도열 했을 때 연대장님이 지나가다 나를 보시고 “야 남 일병! 너는 덩치도 조그마한 놈이 강행군은 어려우니 자동차를 타고 선발대로 먼저 떠나라”고 지시하기에 “연대장님, 저는 제대를 앞두고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긴 아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힘 닿는 데까지 행군을 해 보겠습니다.”고 연대장의 지시를 뿌리치고 배낭과 칼빈총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행군 대열에 끼었다.

 그런데 그 때 처음 경험한 것이지만 수백 명이 대열을 지어 행군 할 때 앞에 선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게 되어 어려움이 없지만 중간이나 뒤에서 따라가는 행렬은 떨어졌다가 붙었다 하기 때문에 항상 앞 대열을 따라가려면 뛰어야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중간이나 뒤에서 따라 가는 사람들이 훨씬 힘이 들었다.

 불행히도 우리 인사과 소속 군인들은 중간에 끼어 따라가다 보니 뛰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 모두 힘들어 했고, 양구에서 춘천 오는 중간쯤에 있는 큰 고개를 넘을 때는 그냥 따라가다가 내리막길에서 갑자기 앞으로 엎어지는 병사가 늘어나서 중간에 모두 차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나도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걸어서 그 날 야영지인 춘천 소양강 모래 사장까지 갔다. 도착해 보니 인사과 병사들 중 끝까지 걸어서 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덕분에 내가 인사과 병사들 중에서 제일 몸집이 작고 힘이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제일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른 대원들은 중간에 차를 타고 왔음에도 지쳐서 모래사장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여 나 혼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저녁밥을 타다가 인사과 대원들을 일으키고 밥을 먹게 하였다.

 그 날 저녁 소양강 모래사장에서 야영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가평을 향하여 출발하기 직전 점호시간에 연대장님이 다시 내 곁에 오셔서, “야 남 일병! 너 어제 차 타고 왔지?”하고 물으시어 나는 아무말 않고 있는데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아닙니다. 인사과 병사들 모두 중간에서 차를 타고 왔는데 남 일병만 혼자 끝까지 걸어왔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연대장님은, “그래! 그러면 오늘은 걷지 말고 차 타고 가라”고 하시는 것을 “아닙니다. 마지막 경험인데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후 다른 병사들은 편하게 차를 타고가는 것을 보고도 나는 우직하게도 마지막 군대생활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걸어서 가평까지 갔다.

 춘천에서 서울 가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평을 가면서 민간인들이 타고 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아! 나는 언제 민간인이 되어 저 버스를 마음대로 타 보나!’하고 탄식하면서 민간인들이 옷을 잘 입었거나 못입었거나 모두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때 비로소 같은 사람이면서 ‘민간인’과 ‘군인’이 그렇게 구별되어 보일 수가 없었다. ‘민간인’만이 사람으로 보이고 ‘군인’은 그저 ‘군인’으로 느껴진 것이다.

 가평에 도착하니 다른 대원들은 모두 차를 타고 왔는데 나만이 끝까지 걸어 왔다고 하여 큰 화제 거리가 되었고, 드디어 연대장님의 특명으로 3일간 야외 훈련 하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막사 안에서 쉬라는 명령 때문에 막사 안에서 신문을 보면서 편하게 쉬면서 훈련이 끝나고 모든 대원들과 같이 차를 이용하여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우직하게도 발이 부르트고 아프면서 그것을 참고 끝까지 걸어서 강행군한 것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제대하기 두어 달 전 가을에 상부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병사 막사를 모두 흙벽돌집으로 개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흙벽돌을 만들어 벽돌집을 짓는 것인데, 재료나 작업도구들은 일체 대어 주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무조건 겨울이 오기 전에 집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총 소대원들과는 달리 연대 인사과에 근무하던 병사들은 대개 집이 먹고 살만하여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라서 집에서 일이라고는 손에 잡아보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집을 지으라니까 엄두를 못 내고 쩔쩔매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