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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2. 27. 10:23
군대생활의 추억Ⅳ

 

 

 나는 어렸을 때 농사일은 해 보았지만 집을 짓는 일은 해 보지 않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해야 된다는 생각에 팔을 걷어 부치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우선 부대 인근에 있는 마을에 나가 톱과 널빤지 등 못 쓰는 것을 얻어 가지고 톱으로 나무를 잘라 흙벽돌 굽는 틀을 몇 개 만들고 근처 흙을 파서 물을 붓고 짚을 썰어 섞어서 흙을 반죽한 다음에 벽돌 틀에 넣어 벽돌을 찍어내서 이를 볕에 말리었다.

 

 당시 내가 일등병으로 인사과에서 계급이 제일 낮았으나 내가 도목수로서 상등병, 병장, 하사 등 상급자들을 지휘하여 일을 하게 되어 어려움이 있었으나 상급자들은 내가 몸은 사리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일을 하니까 그들도 나를 “남형”,“남선생”하면서 나를 따랐다. 벽돌이 마른 후에 벽돌을 쌓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서까래를 얹고 그 위에 판자를 덮고 흙으로 덮은 후에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어 막사를 완성하였는데, 제일 힘든 일은 벽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발라 벽을 고르는 일, 소위 ‘미장’일이었다.

 

 재료가 없어 나무판자로 흙칼을 만들어 그 위에 뭉개 갠 흙을 얹어 벽에다 대고 문질러 보았으나 제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여러 번 실패를 하고 반복 실험을 한 끝에 드디어 기술을 습득하여 미장일까지 손수 배워서 마칠 수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하여 드디어 우리들이 자고 쉴 막사를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때 배운 것은 무엇이든지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와서도 군에 있을 때와 같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더라면 성취하지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을, 사회에 나와 너무 나태하게 살아서 이루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다.

 

 막사를 혼자의 힘으로 완성해 놓으니 나보다 상사인 상등병과 병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임하사까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남 일병’이 아닌 ‘남 선생’으로 바뀌었다.

 

 지나가다가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인사참모가 “야 이놈들이 군대에서 선생이 무슨 소리야. 야 너 남 일병! 너 때문에 군대 군기 모두 다 망쳐놓았다.”고 농담을 하여 같이 있던 일행들이 박장대소 한 일도 있다.

 

 세 번째는, 그 당시 군대 내에서는 상급자가 하급자들을 꼬투리를 잡아 단체기합 주는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주로 상등병이 일등병 이하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우리 부대에서는 그런 단체기합을 줄 수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인사과의 상등병으로 나의 예농 1년 후배 한사람과 학교는 다르지만 공주고등학교를 일년 늦게 나온 상등병이 있었는데 1주일에 한 두 번은 “일등병 이하 집합”하고 단체기합을 주려고 하였다. 일등병인 나는 선착순으로 뛰어가서 맨 앞에 서면 앞의 두 상등병이 “선배님은 빠져라”고 하여 나는 “나도 일등병인데 같이 기합 받겠다.”고 버티면 두 상등병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섰다가 할 수 없이 “해산”하고 가버려 일등병 이하 졸병들은 기합을 면하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제대 후 같이 있던 동료 한 사람이 휴가를 나왔다가 나를 찾아 와서 “아이고, 남 선배가 제대한 후 그 두 상병한테 매일같이 기합 받느라고 혼났다.”고 말해서 같이 손잡고 웃은 일이 있다.

 

 아무튼 나는 짧은 기간동안 군대생활을 했지만 많을 것을 경험했고 배울 수 있었다.

 

 

투병생활(나를 살린 도고 온천수)Ⅰ

 

 

 나는 1957년 6월 5일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1년 6개월의 단기복무(당시 학생 현역병에게는 단기복무의 혜택을 주었음)을 마치고 1958년 11월 30일 귀휴명령(실제 제대 일자는 1959년 5월 20일)을 받고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집은 시골집에 할머니, 어머니,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고, 서울에는 대학에 다니는 두 동생과 야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이 고학을 하며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학업을 계속하는 것보다 가족들과 동생들과 같이 살기 위하여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제대 후 몇 달간은 동생들과 같이 살면서 외판원 등 돈벌이를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누우면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매일 노동이나 하며 젊음을 보내면 내 꿈을 언제 실현할지 막막하기만 하여 잠을 설치면서 고민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결심을 하고 동생들에게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검사하는 것이 꿈인데 이렇게 지내면 영영 내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골로 내려가 사법시험 공부를 할 것이니 너희들끼리 열심히 살아라.”고 당부하고 그 해 가을 공주시 유구면 문금리 처갓집으로 책을 싸 들고 가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처갓집 윗방에서 하루 종일 틀어박혀 책을 읽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놀러 와서 안방에서 장모님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몇 날을 보내다가 처갓집에서 약 1km 떨어진 조용한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식사시간에만 처갓집에 와서 밥을 먹곤 하였다.

 

 겨울에는 해가 짧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1km나 되는 처갓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예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 배가 고팠다가 저녁을 먹게 되니 밥맛이 꿀 맛 같아 자연히 과식하게 되었다. 또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밥 먹고 소화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책상 앞에 앉다보니 소화가 잘 안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