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생활(나를 살린 도고 온천수)Ⅱ
더군다나 군대 제대 이개월을 앞두고 지루한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저녁마다 당시 흔한 도라지 위스키를 안주도 없이 거의 매일 마셔 대서 위가 안좋은 상태에다 식사시간을 거르고 과식하다 보니 겨울을 지내는 동안 위장병에 걸리고 말았다.
1959년 봄 온양온천에 있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한 결과 ‘위하수(胃下垂)’라는 진단을 받았다. 돈이 없어 병원에는 못가고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위장병에 좋다는 약을 먹었으나 별 호험이 없었고 오히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도저히 여러 시간 앉아서 공부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고 소화가 안 되었다. 한번은 마늘이 위장에 좋다하여 마늘을 많이 사다가 익혀서 매일 몇 개씩 장복했는데 눈이 침침해져서 동의보감을 보니 마늘을 과다 복용하면 시력이 나빠진다고 해서 중단한 일도 있다.
통증과 싸우면서 숙소를 처갓집에서 좀 더 가까운 사촌 처남집으로 옮겨 새로운 마음으로 13회 고등고시 시험을 목표로 책을 읽었으나 점점 통증이 심하고 소화가 안 되어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런 진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때로는 책을 덮어놓고 뒷산에 올라가 신세타령도 하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내려와서 책상 앞에만 앉으면 통증 때문에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통증이 심해지고 몸이 갈수록 쇠약해져 정신적 고통도 이만 저만이 아니어서 실망과 좌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내가 있는 곳에서 산 하나 사이에 있는 공주시 광덕면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내던 한백 군을 만나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1960년 5월 19일 큰 산을 넘어 한백 군을 찾아가 밤새도록 정담을 나누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1960년 여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는 ‘악성 위궤양’이라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일곱 남매 등 열한명의 식구들이 전 재산이라고는 이천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전답이 전부였는데 위장 수술을 받으려면 논밭 중 하나를 팔아 수술비를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다. 나 하나 살자고 온 식구의 생명줄이 걸린 땅을 팔 수는 없었다.
특히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위장수술은 성공해야 3년 내지 5년 더 산다고 했다. 식구들의 생명줄인 전답을 팔아서라도 나의 명줄을 삼년 더 연장해야 하는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사에게는 시골에 가서 수술비 마련해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번에는 처갓집이 아닌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나의 집으로 내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체격에 먹지도 못하여 바짝 말라 고향에 내려온 나를 보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아내는 말도 못하고 눈물만 짜다가 어머니께서 “젊은 여자가 옆에 있으면 병이 안 나으니 너는 네 남편 병 나을 때까지 친정에 가 있어라”고 명령하여 아내는 병간호도 못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고 나는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을 받으며 다시 투병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소위 돌팔이 의사가 있어 그가 위장약 주사를 놔주는 등 그의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간간이 먹던 미음도 잘 넘어가지 않아 젊은 놈이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더욱 쇠약해져갔다. 비록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 꿈을 안고 남들이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고생 끝에 졸업을 눈 앞에 두었는데 그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이제 연만하신 할머니와 어머니, 시집와서 하루도 웃어 본 날 없이 고생만 하던 아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딸, 그래도 못난 맏형을 의지하고 살았던 동생들을 버린 채 이젠 죽는구나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제 아쉬움과 슬픔도 말라버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며 잠을 청하던 중 누가 계시라도 하듯 번개 같이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4km쯤 떨어진 도고 온천수가 위장병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옳지! 그거야! 왜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가까운 곳에 위장병에 좋은 약수가 있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라며 탄식하면서 옆방에서 자고 있는 여동생을 깨워 집에서 1km쯤 떨어진 육촌 동생 남달우(당시 19세)를 지금 당장 데려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더니 조금 후에 육촌 동생이 뛰어왔다.
나는 동생에게 “내 조금 전에 생각해 낸 것인데 내일 새벽부터 도고온천에 가서 온천수를 마시려고 하니 새벽에 와서 나를 좀 업고 다녀줘라.”고 하자 동생은 선뜻 응하여 그 다음날부터 새벽에 육촌 동생의 등에 업혀 4km나 되는 도고온천에 가서 개울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를 마시게 되었다. 지금은 그 개울을 콘크리트로 막아 물이 솟아오르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도고온천 옆 개울에서 따뜻한 물이 솟아올랐고, 그 냄새가 계란 썩는 냄새가 날 정도로 유황성분이 많은 약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도고온천수는 위장병에 좋고, 피부병에도 좋다고 소문이 나서 전국 각지에서 위장병, 피부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곤 하여 그 주변 사람들은 도고온천수의 약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토록 위장병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내 가족들은 물론 주위 사람 누구도 그 물을 먹어보라고 귀띔해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나 또한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새벽에 육촌 동생의 등에 업혀 도고온천으로 가서 물이 솟는 냇가에 앉아 옹주박으로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를 퍼서 한없이 마셨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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