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생활(나를 살린 도고 온천수)Ⅲ
도고 온천수는 계란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비위에 안맞는 사람은 한 컵도 마시지 못하지만 냄새가 싫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나는 천행으로 오히려 계란 썩는 냄새가 좋아 계속 퍼 마셔도 배부르지 않고 편하여 많이 마실 수 있었다. 물마시기를 한 삼십분 정도 하다보면 동녘에 해가 솟아오르려는 듯 붉어지고 그 때를 맞춰서 미리 준비해간 네홉들이 정종 병에 물을 담고 검은색 보자기로 싸 가지고 다시 동생의 등에 업혀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사실 여부를 확인은 못했지만 도고온천수는 햇볕을 쪼이면 약효가 다 날라가 버려 효험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나가 해 뜨기 전까지만 물을 마시고 집에 가지고 오는 물병을 햇빛이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검은 보자기로 싸 가지고 와서 낮에 하루 종일 마시곤 하였다. 이상한 것은 현장에서 마실 때는 계란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집에 가지고 온 물은 아무리 마개를 열고 맡아봐도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는 것이다.
새벽에 육촌 동생 등에 업혀 도고온천수를 마시러 다닌지 삼십여 일쯤 지났을 때, 그 날도 동생의 등에 업혀 물을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마침 동녘 산 너머에서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온 몸에 힘이 생기고 나도 저 해와 같이 찬란하게 다시 출발하는구나 하는 감격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동생 등에서 내려 해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살았다! 나도 이제부터 새 출발이다!”라고 크게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과 희열을 갖게 되었고, 병도 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즐겁기만 했다. 그래서 육촌 동생에게 “네 덕택에 나는 다시 살았다. 내일부터는 새벽에 안 나와도 된다. 이젠 나 혼자 다닐 수 있으니 오지마라”고 말하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혼자 온천수를 마시러 다녔고, 집에 돌아올 때는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즐겁게 흥얼거리며 뛰어서 집에 오게 되었고, 다시 내 꿈을 펼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위장병은 거의 완치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지금은 도고온천에 고급 호텔과 콘도 등 빌딩이 들어서고 약수가 솟아오르던 개울에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변하였고, 원탕이란 온천탕에 가도 그 정겨운 계란 썩는 냄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지만, 나는 나의 제2인생을 탄생시켜 준 도고의 온천수를 영원히 잊을 수 없고 그 계란썩는 냄새가 마냥 그립기만 하다.
◈ 4시간 만에 끝난 최초의 직장생활
내가 도고온천 약수를 마신지 사십여 일이 지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식사를 조금씩 할 수 있을 무렵인 1960년 가을, 1961년도 대학졸업예정자 중에서 국토개발대 요원으로 천 오백명을 선발하여 각 행정부처에 배치시킨다는 공무원 채용시험 공고가 신문에 났다. 당시 4·19혁명 덕택에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공무원 조직을 개혁하고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기 위하여 처음 시도한 장면 정권의 최초이자 마지막 역점 사업이었다.
자유당 정권에서는 시험을 보아 공무원을 뽑는 제도는 소위 자격시험인 보통고시와 고등고시 뿐이었고, 일반 공무원들은 여당 국회의원 등 소위 실세들의 추천 명함이나 메모를 가지고 뒷문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뒷문으로 들어간 공무원들은 보다 좋은 자리와 승진을 위하여 권력을 가지 자에게 아부하거나 돈으로 자리를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소위 ‘빽이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빽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던 시대’였다.
당시는 공업화가 안 되어 공무원 말고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는 자리가 석탄공사, 대한중석, 한국전력 등 국영기업체와 은행들 뿐으로, 대기업이었던 삼성, 현대도 대학졸업자들을 공채로 선발하지 않아 취업문이 매우 좁았다.
나는 군에서 제대한 후 13회 고등고시를 목표로 무리하게 공부를 하다가 위장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느라고 시험을 포기하고 겨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조금 좋아졌으나 그 당시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고시 공부만을 할 수 없었다. 나는 1961년도 봄에 졸업하면 아무 곳에라도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우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병이 완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공부할 수 없어 기왕에 가지고 있던 실력으로 시험을 치르자고 결심하고 응시 원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본 결과 다행히 천 오백명 안에 들어 합격하였다. 합격자 발표 후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당에서 합격자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지금 기억나는 강사로는 서울농대 교수 유달영 박사, 고려대 경제학과 조동필 교수, 사회운동가 장준하 씨 등이 떠오른다.
그들의 강의 요지를 간단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과거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자유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여 국민 총소득이 일백달러도 안 되고 자연자원이라야 시멘트 원료인 규석만 있을 뿐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민족보다 향학열이 높아 대학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 여러분이 중심이 되어 열심히 일하여 공무원 사회를 개혁하고 부정부패를 없애고, 하루빨리 농업사회에서 벗어나 공업사회로 발전 시키면 차츰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당시 나는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어렵게 살아 왔지만 우리나라가 선진외국과 비교하여 그렇게 자연 자원이 없고, 뒤떨어진 나라인 것을 처음 깨닫고 놀랐다. 국토개발대 요원 시험을 치르고 채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 대법원에서 법원서기보(현 9급 공무원)모집 공고와 대검찰청에서 미국 CIA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대검 중앙수사국을 신설하고 서기관(4급) 네 명, 수사관(5급) 열 명, 서기(7급 공무원) 스물 네명을 채용한다는 신문공고가 났고, 시험과목도 고등고시 시험과목과 같아 당시 병을 앓느라고 실력이 없어 혹시 한 군데라도 합격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세 군데 모두 시험을 보았더니 용케도 세 군데 모두 합격하게 되었다. 나는 세 군데 중 한 곳만 골라야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고, 또한 나 때문에 두 사람을 떨어뜨린 꼴이 되어 미안하기도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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