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생활Ⅱ
밤 열 한시까지 영어, 수학 등 중요 과목을 가르치고 나면 나도 기진맥진하여 내 공부를 단 십분도 할 시간적 여유와 힘이 없었다. 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학교 강의시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강의 시간을 빼놓지 않고 열심히 들었고, 그것을 자세히 필기해 두는 것이 내 공부의 전부였다. 해당 과목의 법률 서적을 읽는다든지 다른 책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시험 때 겨우 노트만 가지고 공부하여 시험을 봐 학점을 따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법과대학 1학년 대학생활은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고 그저 학점을 따기 위해 학교를 다닌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는 젊음의 낭만도, 여유 있는 과외 활동도 없이 가정교사 하는 집과 학교를 오가면서 기계처럼 학생을 가르치고 강의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위와 같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보다는 내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잠재의식’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서울법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런데 막상 서울법대에 합격하여 그 학교에 다니다 보니 ‘이제는 내 목표를 이루었구나’하는 자만에 빠져 ‘이제는 목표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대학생활 시작부터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허송 세월을 한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자만심과 만족감에 빠져 비록 염색한 군인 작업복을 입었지만 서울법대 배지를 달고 뽐내면서 시내를 활보하였다.
또 내가 서울법대에 입학하여 부딪친 난관은 필수과목으로 독어 원강이나 불어 원강 중 한 과목을 수강하는 일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독어와 불어를 배울 기회가 없어 서울법대 입학시험을 볼 때에도 제2외국어인 독어와 불어 대신 물리를 선택과목으로 택하여 요행히 합격할 수 있었으므로 독어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위와 같이 자만하지 않고 정신을 차렸더라면 기초독일어 교본이나 불어 교본을 사서 보던지 학원에 다녀서라도 독어와 불어를 깨우쳤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독일어의 알파벳도 모르면서 독어 원강을 수강하였고, 시험 때는 문장 전체를 암기하여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학점은 무난히 땄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왜 그렇게 멍청하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가정교사 생활도 1학년 때만 가능했고, 그 다음 해에 바로 밑의 동생 선우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하여 상경하였고, 또 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간 집에서 놀던 셋째 동생 한우가 상경하여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편안하게 가정교사 생활을 계속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래서 용산구 후암동 400번지 피난민촌의 판잣집에 방 한 칸을 세 얻어 삼형제가 자취를 하면서 셋째와 내가 신문배달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당시까지는 아직 구공탄이 나오기 전이라 나무 숯을 사다가 풍로에 불을 붙여 밥을 해 먹었고, 방에는 돈이 없어서 일년 내내 불 한번 넣지 못하고 냉방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우리집이 예산농고 동창들의 연락처 비슷하게 되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친구들 서너명이 찾아와서 밤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며 지내던 것이 지금은 그립기까지 하다.
방에 불을 안 넣다 보니 습기가 차서 방 한군데가 무너져 큰 재떨이만한 구멍이 생겼는데 친구들이 놀러 와서 싸구려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방 가운데 난 구멍에 버렸다가 아침에 일어나 담배 생각이 나면 버린 꽁초를 다시 골라 담배를 신문지에 말아 피우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야 임마, 담배가 없으면 안 피면 될 것을 왜 그리 궁상을 떠냐”고 핀잔 주었다.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없는 것도 서러운데 그렇게 궁상을 떠는 것이 싫어서 나는 평생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그 맹세는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신문배달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겨울 새벽에 일어나 런닝 셔츠 위에 달랑 염색한 군인 작업복만 입고 셋째 동생과 같이 후암동 집에서 태평로에 있는 조선일보사까지 뛰어가서 신문을 받아들고 후암동으로 돌아와 후암동 일대를 뛰어 다니면서 몇 백부를 집집마다 돌렸다. 그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 형제는 추운 줄도 어려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신문배달을 하였다. 지금도 신문배달 할 때의 일이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셋째 동생과 같이 신문배달 나갔다가 동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내가 몹시 화를 내면서 동생을 발길질 한 일이다. 나는 즉시 후회를 했지만 동생에게 한 행동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형이 돼가지고 동생을 편하게 공부를 시키지는 못할망정 새벽잠을 못 자게 하고 신문 배달을 시키면서 그렇게 때리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동생은 그 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의학 박사가 되어 치과병원을 개설하여 돈도 많이 벌고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있다. 또 못난 형에게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잘 하고 자식이 많은 형을 도와주기 위하여 조카들의 등록금은 물론 금전적 지원도 많이 해 주어 늘 고맙게 여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2년 간 꼬박꼬박 신문을 받아보면서 신문 값을 한 푼도 안 낸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송재근이란 사람이다. 그 사람은 신문 값을 달라고 하면 안 준다는 말은 않고 “내일 준다”고 미루면서 2년을 버티었다. 결국 나는 2년 동안 그 사람에게 신문값 한 푼도 못받고 포기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오십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사람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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