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 결혼Ⅱ
처갓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하룻밤을 더 잔 후 신혼 여행은 꿈도 못꾸고 우리 부부는 집에 돌아와 우리 부부의 신혼생활은 시작되었지만, 그 때부터 나의 아내는 달콤한 신혼 생활이 아니라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신랑이란 사람은 신부를 집에 데려다 놓고 학교에 가서 와봐야 1주일 아니면 2주일에 한 번씩 와서 자고 갈 뿐 아무런 집안 일을 돌보거나 생활비 한 푼 못 대는 무능한 남편이었다. 나의 아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 여섯 명이나 되는 시동생과 시누이를 거느리고 없는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느라고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의 독수공방 생활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서울에서 살 때와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 후 복학하여 공부할 때까지 장장 팔 년간 계속되었고, 1961년 4월, 내가 처음 직장을 잡고서야 서울에 단칸방을 얻어 아내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새 살림을 차린 후에도 단칸방에 동생들과 두 딸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고, 나는 공부방이 없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자며 사법시험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도 아내의 독수공방의 생활은 몇 년간 더 계속 되었다.
나는 일 때문에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아내는 8년간 남편없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보통 사람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아내는 오직 남편의 성공을 위하여 불평 한 마디 없이 가족들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 주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결혼 후 5년이 지나면 온다는 ‘권태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항상 신혼생활 기분으로 부부생활을 하였고, 그것은 최근 몇 년 전까지 계속 되었다.
나의 아내는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배운 사람 이상으로 넓은 도량과 이해심으로 가정을 이끌고 밝은 인상으로 항상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다. 만일 아내의 희생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물론 우리 가정의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내 아내를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며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내는 시집와서 네 명의 시동생과 두 명의 시누이를 키워 결혼시키는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그 덕분에 동생들 중 두 명은 박사가 되었고, 한 명은 사장
이 되어 모두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동생 둘을 먼저 잃은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 55년생 큰 딸 현숙, 61년생 둘째 딸 정숙, 65년생 큰아들 재홍, 67년생 셋째 딸 희숙, 71년생 막내 아들 재욱을 낳아 5남매를 두었다.
큰 딸과 둘째 딸은 내가 한참 공부하고 고생할 때 낳아 돌보지 못했고, 그 아래 아들은 검사로 재직하면서 여기저기 전근을 다니느라고 같이 있어주지 못하여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정 한 번 표시하지 못하고 키워서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 아프게 느끼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큰 딸애가 세 살 때 시골집에 갔을 때 큰 딸애가 반가워서 “아버지”하고 따르는 것을 창피한 생각이 들어 “야 임마,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하고 소리 질러 딸애를 울렸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딸에게 미안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처럼 자식들이 아버지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모두 심성이 착하고, 아내의 가정교육 덕택에 모두 반듯하게 자라주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모두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미고 자식들을 낳고 잘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 부부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부부는 지난 2003년 11월 26일 ‘금혼식’에 번잡한 것이 싫어 잔치를 생략하고 자식들과 같이 제주도 여행을 가서 결혼 생활 오십년을 뒤돌아보면서 아내와의 사랑과 가족들의 화목을 다졌고, 자식들의 주선으로 기념사진첩을 만들었다. 또한 곧 다가올 회혼식(결혼60년)도 조촐하게 치러 아내를 기쁘게 해줄 생각이다.
나는 육십여 년간 아내와 같이 살면서 처음 장가갔을 때 아내와의 약속 중 한가지는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결혼 후 얼마 안되어 아내와 같이 육십리길을 걸어서 처가에 가는 길에 처갓집 근처에 있는 <갈지 고개>를 넘으면서 아내에게 “지금은 당신과 걸어서 처갓집에 가지만 내가 꼭 성공하여 고급 승용차를 타고 친정에 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결혼 후 40년이 지나서 에쿠스 승용차를 타고 처가 마을에 가게 되어 늦게나마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
지금 처갓집에는 사위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시던 장인, 장모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니 허전하기만 하다. 나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나를 항상 편안하게 내조해주던 아내에게 다시 장가를 가고, 아내를 고생을 시키지 않고 사랑하고 호강시켜 주면서 행복하게 살 것을 다짐해 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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