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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충남시대 2022. 11. 1. 16:41

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의 추억Ⅲ

 

◇윤규상 선생님과의 만남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예농 영어 선생님으로 부임하신 윤규상 선생님을 만난 것도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나는 윤규상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웠지만, 실제로는 사물을 판단하는 지혜를 배웠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성균관대학교 경제과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경제와 관련된 사회과목을 가르쳐야 했는데 당시 학교 사정으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영어를 전공한 다른 선생님보다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셨지만 뚜렷한 주관과 소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어느 선생님보다도 잘 아시는 것 같았다.
 
 윤규상 선생님은 영어시간에 들어오셔서 학생들에게 항상 뚜렷한 인생관을 가질 것을 강조하시고 영어 시사잡지인 『타임』이나 『뉴스위크』를 들고 들어오셔서 국제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솔직히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은 시골 농업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한정되어 있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무척 좁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오신 후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국제 정세를 소상히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영어 시간에 단순히 영어 문법이나 문장 해석을 배우는 것보다는 선생님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시사 강연을 듣는 것이 몇 십배 재미있었고, 학생들에게 유익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님을 본받아 1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 가서 『뉴스위크』를 사다가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뜻도 모르고 열심히 읽어보곤 하였다. 그리고 외출할 때 『뉴스위크』를 손에 말아 쥐고 들고 다니면서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내가 『뉴스위크』를 사서 읽는 것을 아시고는 내게 『뉴스위크』에 나오는 칼럼란을 번역하여 학교 게시판에 붙여 놓고 모든 학생들에게 그것을 읽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 사전을 펴 들고 끙끙거리면서 번역을 하여 게시판에 매주 번역한 칼럼을 붙여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로 번역하여 게시판에 붙인 것이 부끄럽고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지만, 그 때는 왜 그리도 자신만만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윤규상 선생님은 나에게는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해주셨고 또 미래를 바라보게 해 주신 은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윤규상 선생님을 모든 선생님 중에서 제일 존경하였고 좋아했으며, 가끔 선생님 댁을 찾아가 선생님과 대화하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님은 내가 2학년 때 나를 돕기 위하여 교내에 있는 기숙사로 쓰던 방 한칸을 개조하여 ‘협동조합 구내매점’을 개설하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노트, 연필, 펜, 잉크 등 학용품을 학생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 선생님의 의도는 학생들이 각 소매점에서 학용품을 사 쓰는 것보다 도매로 사다가 학생들에게 적은 이익을 남기고 저렴한 가격으로 학용품을 팔면 학생들도 좋고, 또 적은 이익이지만 그 돈으로 어렵게 공부하는 나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시중의 문방구에서 사는 것보다 값이 싼 학용품을 사러 많이 모여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상품은 갓 구어 온 따끈따끈한 빵이었다. 아침에 빵 상자를 갖다 진열해 놓으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불티나게 팔려 매진되곤 하였다. 간혹 빵을 팔다가 한두 개 남으면 외상 장부에 적어놓고 우리들끼리 먹어버리곤 하였다. 빵 한 개 값은 얼마 안 되었지만 그것이 몇 달간 쌓이다 보니 내가 물어내야 할 돈이 눈덩이 같이 불어나서 당시 나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가 되었다.

 고민 끝에 결산을 볼 때 선생님께 사실대로 고하고 용서를 빌었더니 선생님께서는 다음부터 주의하라면서 선생님의 월급에서 내가 축낸 돈을 변상해 주었다.

 나는 그 때 공금이나 남의 돈을 단 한 푼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처음에 적은 돈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액수는 눈 덩어리처럼 불어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큰 실수를 했어도 변함없이 나를 아껴 주시고 돌보아 주셨다.

 특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 신분으로 장가갈 때 후행으로 따라갈 집안 어른이 없어 선생님께 부탁하자 선생님께서는 교통편의도 없는 백리의 시골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흔쾌히 승낙하여 후행으로 따라 가셔서 나를 도와주셨다. 그만큼 나는 당시 선생님을 단순한 스승이 아닌 부모님이나 형님과 같이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윤규상 선생님은 내가 졸업한 후에도 몇 년간 더 교직에 계시다가 고향인 덕산면 시량리에 자리를 잡으시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사십여 년간 회장으로 역임하시면서 윤봉길 의사 추모사업과 그 분의 사상을 연구 계승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고 계시고, 또 내포지방향토문화 연구회와 윤봉길 의사 공제조합인 매헌 새마을금고를 발족하시어 회장으로 역임하시는 등 지방문화 개발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면서 아직도 청춘과 같이 건강하게 삶을 누리고 계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