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재주 좋으시고 정직하셨던 어머니
충남시대는 충남의 천재로 불리우던 불우소년 남문우 변호사 자서전을 본지에 연재한다. 남변호사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성공한 삶의 사례가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남문우 변호사님
나의 어머니는 1914년 5월 7일(음 4월 13일)에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안골)에서 태어나서 18세 되는 해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나를 비롯하여 선우·한우·열우·형우·명순·인숙 등 7남매(5남 2녀)를 낳아 키우셨다.
어머님은 당시 다른 어머니들처럼 학교 공부나 한문 서당공부는 못하셨지만 면 내에서 암산왕으로 소문난 아버지와 함께 머리가 좋으시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자식들은 모두 부모를 닮아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넷째 이하 동생들은 가정 형편상 중·고등학교는 제대로 못다녔지만 검정고시를 거쳐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젊었을 때 몸이 약하시어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장남인 내가 10km 떨어진 아산시 신창면 오목리에서 어머님의 종조부(從祖父)께서 경영하는 한약방에 가서 한약을 지어다가 달여드려 한약을 장복하면서 사셨다.
어머님은 손재주가 좋으시고 눈썰미가 뛰어나셨다. 남이 입은 양복을 한 번 보시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에게 손수짜신 무명천을 검은 물을 들여 손바느질로 양복을 지어 입혀주셨다. 그래서 남들은 바지저고리나 등거리 잠뱅이들을 입고 학교에 다녔지만 우리 형제들은 양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머님은 음식솜씨도 뛰어나 어머니가 담그신 된장·고추장·간장 맛이 동리에서 제일 맛있었다. 내가 결혼 후에는 아내가 어머니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지금까지도 집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고 있다.
한 번은 어머님이 이북땅에서 살거나 가본 일도 없는데 이북에서 많이 해먹는 이북식 만두를 만들어 먹었는데 어찌나 매콤 고소하게 맛있었던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그 만두 맛이 그립다.
어머님은 몸은 약하셨으나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몸져 누워계실 때만 빼고는 열심히 일하셨다. 밭에 목화를 심어 할머니와 같이 무명실을 뽑아 겨우내 베틀에 앉아 베를 짜셨고, 여름에는 삼베를 짜서 시장에 팔아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서 소작논 1000평만 가지고 살던 우리 집이 논 2000평과 밭 500평으로 늘려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님의 근검절약 정신은 몸에 배어 노년기까지 한 푼도 헛되이 쓰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자식들이 어느 정도 살만해진 후 어머님께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려고 외식을 하자고 하면 “집에서 된장찌개에다 김치하고 밥먹으면 되지 뭣 때문에 비싼 돈주고 사먹느냐”고 거절하시어 어머님이 70이 넘도록 변변한 외식 한 번 못해드렸다.
80이 넘어서야 겨우 응하시어 몇 번 외식을 한 일이 있긴 하나 그것이 몇 번이나 되었겠는가?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님 모시고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제주도도 구경시켜드리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어머님은 인정도 많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누구 집 할 것 없이 조석으로 밥을 해먹을 수 있으면 잘 사는 집이라고 할 때다.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여섯째 자식을 낳고 먹을 것이 없어 아침을 굶고 우리집대문밖에서 못 먹어 뚱뚱 부은 얼굴을 하고, 마침 여름철이라 마당에 자리를 깔고 우리 식구들이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을 들여다보며 힘없이 서있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어머님은 밖으로 나가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와 앉히고 당신 몫의 밥을 그 아주머니에게 모두 넘겨주시곤 어머님은 아침을 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어머님은 정의감도 강하셔서 매사에 정직을 생활신조로 살아오신 분이시다. 항상 자식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님은 허세 부리는 사람, 거짓말 하는 사람, 잘난 체하는 사람, 술 마시고 노름하며 빈둥빈둥 노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고 미워했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 점잖은 사람을 좋아하시어 호(好)·불호(不好)가 분명한 분이셨기에 자식들은 어려서부터 어머님을 무서워했고 남들도 어머님을 어려워했다. 또한 이유 없이 남에게 의지하거나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아니하셨다.
어머님은 1952년 2월 5일(음 1월 20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이 든 자식들은 공부한답시고 객지에 나가 있을 때 38세의 젊은 나이에 몸까지 허약한 여인의 몸으로 집안살림을 도맡아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말로 표현 못할 고생을 하셨다.
혼자 농사를 지으시면서 10리나 떨어진 높은 산에 올라가 점심도 굶어가면서 하루 종일 땔나무를 해놓으시고 며느리와 함께 저녁 늦게 집으로 운반하는 일을 매일 반복하셨다.
그 와중에도 둘째아들이 고학하느라고 돈벌이를 하다가 사기를 당하여 빚을 많이 지자 어머님은 두말없이 우리 가족의 생명줄과도 같은 논밭을 전부 팔아 빚을 갚아주는 결단을 보이시기도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조상 섬기는 일에도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을 다하여 실천하셨다.
고조부모님 산소와 증조부모님 산소를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와 공주시 신풍면 세동리, 공주시 신풍면 조평리 산에 모셨는데 모두 평지에서 1km 이상 거리의 언덕 위에 있어 젊은 사람도 산소에 올라가기가 힘드는데 어머님은 1년에 두 번씩 성묘를 다니시고 산소가 높은 산중턱에 있어 잔디가 잘 자라지 않자 자식들한테 연락도 없이 손수 일꾼을 사서 몇해마다 한 차례씩 사초(莎草:무덤에 떼를 입히고 다듬는 일)를 하시다가 1992년 4월에는 3일간에 걸쳐 봉분 주위를 화강암으로 다듬은 둘레석과 상석까지 설치하셔서 이제는 사초를 자주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셨다. 또한 용돈을 절약했다가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와 세동리에 위토답을 장만하시어 산소 관리인에게 경작하도록 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도 자식들이 성묘갈 때면 따라가셔서 산소까지는 못 올라가시고 밑에서 산소를 향하여 묵념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어머님의 자식 사랑은 지극하셨지만 겉으로 드러내놓고 칭찬하는 일은 없었으며, 대신 잘못하면 호되게 나무라곤 하셨다.
아들들이 직장을 가지고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할 때부터 매월 용돈을 조금씩 드리면서 “이제 아무런 걱정 마시고 쓰시고 싶은 데 쓰시면서 즐겁게 사시라”고 하였는데도 어머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와 딸들을 호출하길래 무슨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긴장했는데 어머님께서는 “그동안 늙은 시어미 모시느라고 고생들 했다”며 봉투 한 개씩을 나누어 주셔서 며느리들은 돈 10만 원 정도씩 주셨겠지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10만원이 아니라 10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씩이 들어있어 깜짝 놀라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하고 다시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이렇게 통이 크신 분이기도 했다. 그동안 자식들로부터 조금씩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안 쓰시고 수 10년 간 은행에 저축했다가 7천만원을 한꺼번에 찾아서 7남매에게 1000만원씩 나누어 주신 것이다.
어머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때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시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셨으나 노년기에 들어서시면서 건강한 몸으로 병원에 안가시고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시다가 2006년도에 건강이 악화되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6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잃으시어 다섯째 아들 집에 모시고 동생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2009년 9월 7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남인 내가 당연히 어머님을 모셔야 했으나 형편상 동생에게 수십 년간 모시게 하여 지금까지도 동생 부부 특히 제수씨한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님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되시어 갖은 고생을 하면서 7남매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공으로 1968년 5월 8일 충남도지사로부터 모범표창을 받으시고 노년에 두 아들(둘째 넷째)을 앞세우는 슬픔을 겪기도 했으나 다른 자식들과 손자들 잘 되는 것을 보시면서 편안하고 여유있게 사셨다고 생각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57년간이나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지셨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 저승에서라도 함께 지내시라고 아산시 도고면 시저리 고향 종산에 계시는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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