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합격
1961년 5월 25일 첫 월급을 받은 날 아내는 시골집에서 둘째 딸 정숙을 낳았다. 나는 둘째 딸의 백일날인 1961년 9월 초순경 시골집에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단칸방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결혼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아내는 시골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살다가 비로소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다시 단칸방에서 다 큰 시동생들과 함께 나의 적은 월급 봉투를 가지고 여러 식구의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그 때부터 아내의 내조를 받으며 공부를 시작했으나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아 소화가 안 되고, 저녁에는 단칸방에 동생 및 딸들과 같이 살다보니 공부 할 여건이 나빠 낮에 직장에 나가 책을 읽는 정도였으니 진도가 나갈 리가 없었다. 모든 과목 책을 한번씩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14회 고등고시 공고가 나서 망설이다가 시험 삼아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응시해 보기로 했다.
시험 전날 신경이 예민해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다음 날 시험장에 가 앉으니 머리가 띵하고 몽롱하여 답안이 잘 떠오르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오전 시험을 치르고 오후 시간에 형법 과목 시험을 보는데 두 문제 중 첫 문제에 대한 답안을 쓰고 두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쓰던 중 나도 모르게 머리를 책상 위에 박고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시험 마감 십오 분 전에 울리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쓰던 답안지에 침을 흘리면서 잠을 자고 있었고, 두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 작성은 몇 줄 쓰다가 중단한 상태였다.
너무도 어이없고, 당황한 나머지 부랴부랴 답안을 써내려 갔으나 시간이 모자라 답안 작성을 완성치 못하고 말았다. 중간에 시험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다가 원래 합격을 목표로 한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점수를 알아보기 위하여 나머지 시험과목을 끝까지 보았다.
그 동안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시험기간 중에 어처구니 없이 잠을 자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실력도 발휘 못하여 안타까웠다. 합격자 발표 결과 물론 낙방했지만 총무처 고시과에 시험점수를 알아보니 민사소송법에서 70점이 넘게 나왔고, 잠자다가 다 못 쓴 형법은 첫 문제는 30점이상 나왔으나, 두 번째 문제는 10점이 안 나와 50점 미만이 나온 것을 확인했다.
점수를 보고 난 후에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실수 없이 시험을 치르면 합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62년 봄에 실시 예정인 15회 고등고시를 위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책을 잃고 퇴근 후와 휴일에는 당시 나와 같이 중앙수사국 수사관으로 근무하던 민건식 형의 주선으로 아현동에 있던 갱생보호위원회의 빈 사무실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1962년 7월 15회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 결과, 함께 공부하던 민건식 형은 영광스럽게 합격하였으나 나는 또 떨어지고 말았다.
시험에 떨어져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당시 대검찰청 차장검사 주운화 사무실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차장 검사실에 갔더니 차장검사가, “남 계장! 이번 고등고시에 아깝게 떨어졌더군. 알아보니 총점에서 2점 모자라 떨어졌어. 좀 더 분발하면 다음에는 꼭 합격할 테니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셨다. 내가 직접 총무처에 점수를 알아보니 정말 대검 차장검사 말대로 총점에서 2점 모자라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면 다음 번에는 틀림없이 합격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민건식 형은 나보다 먼저 검사가 되어 검사생활을 훌륭히 하면서도 전문 서적 저술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2년전 정년 퇴직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피해자학 연구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도 검찰 선배 중 유일하게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다.
나는 1962년 9월 경부터는 정보부로 파견 명령을 받고 경운동에 있는 경제 기획원 통계국 2층에 있는 중앙정보부 범죄분석과에서 일하면서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낮에는 일하고 일이 없을 때는 서류창고 복도에 책상을 놓고 공부를 했다. 또 밤에는 전직원이 퇴근하고 난 뒤 혼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잘 때는 책상을 붙여 놓고 그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자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이불을 치우고 책상을 원래의 위치에 옮겨 놓곤 하였다.
식사는 처음에는 손수 구내식당 옆에서 밥을 해서 먹었으나 얼마 안있어서 당시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마음씨 착한 열 여섯살의 어린 소녀 조명순이 내 사정이 딱했던지 밥을 지어 준다고 자청해서 그녀의 도움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그녀의 집안형편으로는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딸이라는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시켜주지 않아 가출하여 식당 종업원을 하면서 야간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고학생이었다.
그녀는 고학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잘 살고 있다. 현재까지도 잊지 않고 가끔 연락하고 집에도 찾아오곤 하였는데, 얼마 전에는 아들이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다면서 아들과 함께 와서 아들을 인사시킨 일도 있다. 나는 가장 어려울 때 그녀의 신세를 많이 졌으면서도 한 번도 마음 놓고 은혜를 갚지 못하여 항상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다.
통계국에서 자고 일하는 동안 여자 직원들 중 몇 명이 아침에 출근할 때 김치나 밑반찬을 집에서 싸 가지고 와서 먹어보라고 주는 일도 가끔 있었다. 내가 공부한다고 사무실에서 제대로 잠도 못자고 먹는 것도 시원찮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안 되었으면 그녀들이 나를 동정하여 그런 일을 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통계국 2층 사무실에서 잠을 자며 공부하는 동안 제일 어려운 고통은 외로움이었다. 낮에 사십여 명의 여자 직원들이 일하느라고 북적 거리다가 저녁 여섯시가 되면 모든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집으로 가고 혼자 남아 밤을 새다시피 앉아 공부할 때의 외로움과 고독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지 못할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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