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일반직 공무원으로 검사 직무대리를 한 사연Ⅱ
검찰총장은 당시 제2인자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검찰청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사법시설 특별법을 만들어 검찰청사를 현대식 고층 건물로 신축하여 검사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하였고, 검사들의 복지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셨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전국 검사장회의 때는 회의를 끝마치고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인솔로 전국 검사장들이 청와대로 대통령을 면담하게 되어 있는데,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은 대통령께 “검사장들이 짚차를 타고 있어 권위가 안 서니 승용차로 바꿔주십시오.”라고 요청하여 즉시 대통령의 승낙을 받아 내자 그 중 용기있는 지방 고검 검사장 한 분이 “각하 이왕에 주시려면 오늘 지방에 내려갈 때 타고 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요청하자 대통령께서 즉시 자동차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지방 검사장들이 그 날 새로운 승용차를 타고 귀청했다는 일화도 있다.
여하튼 처음에 거부감을 가졌던 검사장들은 젊은 검찰총장의 폭넓은 지도력에 감복되어 그 이후 8년 간 검찰총장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검찰의 전성시대를 이룩하였다.
검찰총장은 검사 인사도 학연이나 지역적 편중 없이 서열과 능력 위주로 공평하게 행하여 모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외부 권력기관(중앙정보부)으로 부터 부하 검사들을 보호하는데도 신경을 써서 당시 검찰 조직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는 조직이 되었다.
검찰총장은 군법무관 소령으로 전역한 후 일약 검찰총장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검찰총장이 육군 법무관 시절 휴일에 고향인 서천에 갔다가 장항선 기차를 타고 부대로 귀대 중 앞자리에 앉은 스님이 한참 동안 육군 대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당신은 귀골로 태어나서 앞으로 3년 안에 장관급으로 승진할 수 있으니 몸조심 잘하라”고 해서 “내가 육군 대위 주제에 무슨 3년 안에 장관이 됩니까?”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는데 뜻밖에도 3년 안에 5·16혁명이 나고 얼마 안 있어 장관급인 검찰총장이 된 것이다.
검찰총장은 관직을 그만 두고 변호사 업무를 하셨으나 일반 사건을 안 맡고 합동법률사무소만 차려 놓고 공증 업무만 하다가 타계했다.
총장은 키가 크고 외모도 준수하여 첫인상은 근엄하고 권위적인 사람으로 비쳤으나 사실은 자상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계실 때 어쩌다 인사차 찾아뵈면 카페트 깐 사무실 바닥에 화선지를 놓고 서예를 하다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지난날 이야기도 자상하게 들려주곤 하였다.
한 번은 찾아갔더니 마침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박지만이가 또 마약을 하다가 수원지검에 구속되었는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가서 돌봐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 수원교도소로 지만이 면회 가려는 중이야.”하면서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고 차를 대접한 후에 수원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검찰총장은 평소 법정이나 검찰청에 출입하지 않았으나 과거 모시던 대통령의 아들이 잘못되자 몸소 지만이를 돌보러 나선 것이다. 그만큼 의리를 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신직수 검찰총장을 상사 이전에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그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있었던 일들Ⅰ
나는 1964년 9월 1일 사법대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검찰청에서 일하면서 사법대학원에 다니면서 강의를 들었다. 사법대학원 강의가 있는 날은 사법대학원에 가서 강의를 듣고 강의를 마치거나 강의 없는 날은 검찰청 사무실에 나가 일을 한 것이다.
내가 검찰청에서 하는 일은 직원들이 범죄통계표를 만들어 놓으면 그 통계표를 분석하여 논문을 쓰고 편집하여 범죄분석지를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직원들이 통계표를 만드는 시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고, 또 통계를 분석하여 원고를 쓰는 일은 야간에도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학교에서 낮에 강의를 듣고 사무실 일을 하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법동기생 열 세명 중 나를 포함하여 서너명만 빼고 대부분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병들로서 순진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았다. 게다가 대부분 나보다 나이도 칠팔세 어리고 서울법대 대학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나에 대한 호칭은 “문우 형”이었다. “선배”나 “형”보다 “문우 형”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후에 동기생 중에 법무부 장관이 된 김종구 장관은 장관 시절에도 나와 통화할 때 “문우 형”으로 불러주었고, 지금도 김 장관을 비롯한 동기생들이 변함없이 “문우 형”이라고 불러주고 있다.
우리보다 위 기수인 3, 4, 5기생들은 판례비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는 등 단체 행동을 하여 가끔 학교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우리 동기생들은 선배들의 투쟁 덕분에 판례 연구비 등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고, 또 모두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라 학교 당국과 마찰없이 잘 지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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